미국에선 아무리 오래 살고 몇대를 내려가도 한국인은 그대로 한국인이다. 한국말을 모르고 영어가 유창하며 이름도 바꾸고 미국인 행세를 제아무리 잘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입만 다물면 그날로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얼굴이나 체격이나 일본인과 많이 닮아 구분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들이 재일 한국인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일본에선 한국인으로 살자면 온갖 차별의 수모를 감수해야 한다.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불이익도 당해야 한다. 한국인임을 숨기고 일본인 행세를 하면 그런 차별에서 얼마간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처럼 당장 표가 나는 것도 아니고 간단히 일본인 속에 파묻혀 버리면 되는 것. ◆그러기 위한 방법의 하나가 일본식 성명을 갖는 것이다. 재일 한국인들은 거의 모두가 2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본명」과 「통명」이다. 「본명」은 우리말 성명이고 「통명」은 일본사회에서 통하는 일본식 이름인 것이다. 「본명」은 집안과 교포사회 또는 모국과 관련되는 경우에 쓰는 이름이고 「통명」은 일본사회에서 생활하는 데 쓰는 이름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아예 「통명」만 쓴다는 응답자가 78%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명」을 쓰는 이유는 『부모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 55.7%,『일본에 살고 있으니 일본명 사용이 당연』이 25.8%,그리고 『한국명을 사용하면 불이익이 있기 때문』이 11.1%의 순이었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당한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녀들에게 「통명」을 지어주고 「본명」을 모르게 하는 경우가 많다. 재일한국인 청소년들은 16세가 되어 외국인등록을 할 때 비로소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때문. ◆오사카 거주 한국인 자녀 중 절반 이상이 차별 때문에 한국식 「본명」을 숨기고 있으며 대부분은 「본명」사용을 꺼린다는 한 오사카 인권단체 조사결과도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차별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본명」을 지키라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다. 그러나 비슷한 처지의 중국인들은 81.9%가 「통명」을 쓰지 않는다니 어쩐지 아쉽고 섭한생각이 든다.
1991-06-1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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