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에야 이어진 “남북 도예가의 우정”/소년시절 개성서 4년동안 함께 도예수업/재일동포 통해 소식듣고 직접 만들어 선물
북한최고의 인민예술가이자 북한 현존 도예가중 고려청자 재현 제1인자로 알려진 우치선씨(72)가 소년시절 개성에서 함께 도예를 익힌 남쪽 벗에게 상감청자 1점을 보내왔다. 이 선물을 받은 이는 남쪽의 저명한 원로 도예가 황종구씨(71·전 이대교수). 소년시절 가슴뭉클했던 사연을 써서 함께 담아온 이 청자는 「도라지꽃 상감장식 꽃병」이란 현대 고려청자로 19일 일본인 미술상 하조씨(팔정의헌)에 의해 황씨에게 전달됐다.
이 청자는 최근 재일 한국인 신현동씨가 북한 친척을 통해 우씨로부터 전해받은 뒤 친분이 있는 하조씨를 통해 황씨에게 전달한 것. 선물을 전하기 위해 급히 내한한 하조씨는 『북한의 우씨가 황선생의 얘기를 듣더니 눈물을 흘리며 선물을 꼭 전해달라 부탁했었다』고 전했다.
우씨의 우정을 전해들은 황씨는 금방 맑은 눈빛의 소년시절 모습으로 돌아갔다. 황씨의 기억에 따르면 1930년대 후반,고려문화의 본바닥인 개성에다 일본인들은 고려청자를 재현할 욕심으로 요업자료 실험소를 차렸다. 이 때 황씨의 부친이며 당대 3대 장인으로 꼽히던 도공 황인춘씨(1949년 작고)를 촉탁기사로 채용했다는 것이다.
서울에 살던 황씨 가족은 개성으로 이사했고 요업실험소에 나가는 황씨의 부친은 따로 조그마한 도자기 연구소를 차려 20명 정도의 소년들을 문하에 두었다.
이 무렵 10대 동년배로 만난 것이 오늘의 황씨와 우씨.
그러나 황씨가 우씨를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비해 우씨의 황씨에 대한 추억은 간절한 때문인지 생생했다는 것.
선물을 전해달라며 우씨는 이런말을 되뇌었다고 했다. 『그때 우리의 스승님은 매우 엄하셨어. 힘든데다 호되게 야단맞은 나는 도업을 포기할 정도로 절망하며 뛰쳐나가 울곤했지. 그때 종구가 뒤쫓아나와 내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었지…. 그 친구가 격려를 해주어 오늘의 내가 있는지 몰라』
황씨는 그와 함께 있었던 기간을 약 4년정도로 회고했다. 일제말기 아들이 전쟁터에 끌려나갈 것을 우려한 황씨의 부친은 그를 일본 세도(서도) 요업학교로 유학보냈고 황씨는 청년기를 일본에서 지내며 그들에게 전해진 우리 고유의 도자문화를 재습득하는데 몰두했다. 그래서 고려청자 재현에 외길을 바쳐온 황씨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 무척 인정받는 도예가의 한 사람이 됐다. 이번 북의 우씨가 황씨의 소식을 전해들은 것도 일본에서 얻은 황씨의 명성 때문이었다.
지난 80년초부터 지금까지 일본에서 크고 작은 발표회를 무려 88회나 가진 황씨의 개인전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수많은 재일 한국인들이 다녀갔다.
이번에 옛 우정의 다리를 놓아준 신현동씨는 황씨 작품에 매료돼 있던 일본 나라(내랑)현 가시하라(강원)시 고고학연구소의 한국인 연구원. 신씨는 얼마전 일본을 방문한 북의 친척에게 황씨의 작품 다완을 선물했고 북의 친척이 고향에 돌아가 우씨를 만난 자리에서 남과 북의 도자기 얘기를 하다가 황씨의 작품을 보인 것이 우정의 가교를 놓는 계기가 됐던 것.
우씨의 뜻을 전해들은 황씨의 마음은 물론 반갑고 기뻤으나 마음 한구석엔 썩 내키지 않은 것이 있다고 했다.
『꽃병이 기술적인 측면에선 상상외로 발전돼 있지만 무언가에 쫓긴듯 독창성이 없어 보인다』고 말한 황씨는 『이 도자기를 보낸 우씨의 우정표현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또 이 항아리를 내 자신이 보관해야 할지 좀더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말했다.<이헌숙기자>
북한최고의 인민예술가이자 북한 현존 도예가중 고려청자 재현 제1인자로 알려진 우치선씨(72)가 소년시절 개성에서 함께 도예를 익힌 남쪽 벗에게 상감청자 1점을 보내왔다. 이 선물을 받은 이는 남쪽의 저명한 원로 도예가 황종구씨(71·전 이대교수). 소년시절 가슴뭉클했던 사연을 써서 함께 담아온 이 청자는 「도라지꽃 상감장식 꽃병」이란 현대 고려청자로 19일 일본인 미술상 하조씨(팔정의헌)에 의해 황씨에게 전달됐다.
이 청자는 최근 재일 한국인 신현동씨가 북한 친척을 통해 우씨로부터 전해받은 뒤 친분이 있는 하조씨를 통해 황씨에게 전달한 것. 선물을 전하기 위해 급히 내한한 하조씨는 『북한의 우씨가 황선생의 얘기를 듣더니 눈물을 흘리며 선물을 꼭 전해달라 부탁했었다』고 전했다.
우씨의 우정을 전해들은 황씨는 금방 맑은 눈빛의 소년시절 모습으로 돌아갔다. 황씨의 기억에 따르면 1930년대 후반,고려문화의 본바닥인 개성에다 일본인들은 고려청자를 재현할 욕심으로 요업자료 실험소를 차렸다. 이 때 황씨의 부친이며 당대 3대 장인으로 꼽히던 도공 황인춘씨(1949년 작고)를 촉탁기사로 채용했다는 것이다.
서울에 살던 황씨 가족은 개성으로 이사했고 요업실험소에 나가는 황씨의 부친은 따로 조그마한 도자기 연구소를 차려 20명 정도의 소년들을 문하에 두었다.
이 무렵 10대 동년배로 만난 것이 오늘의 황씨와 우씨.
그러나 황씨가 우씨를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비해 우씨의 황씨에 대한 추억은 간절한 때문인지 생생했다는 것.
선물을 전해달라며 우씨는 이런말을 되뇌었다고 했다. 『그때 우리의 스승님은 매우 엄하셨어. 힘든데다 호되게 야단맞은 나는 도업을 포기할 정도로 절망하며 뛰쳐나가 울곤했지. 그때 종구가 뒤쫓아나와 내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었지…. 그 친구가 격려를 해주어 오늘의 내가 있는지 몰라』
황씨는 그와 함께 있었던 기간을 약 4년정도로 회고했다. 일제말기 아들이 전쟁터에 끌려나갈 것을 우려한 황씨의 부친은 그를 일본 세도(서도) 요업학교로 유학보냈고 황씨는 청년기를 일본에서 지내며 그들에게 전해진 우리 고유의 도자문화를 재습득하는데 몰두했다. 그래서 고려청자 재현에 외길을 바쳐온 황씨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 무척 인정받는 도예가의 한 사람이 됐다. 이번 북의 우씨가 황씨의 소식을 전해들은 것도 일본에서 얻은 황씨의 명성 때문이었다.
지난 80년초부터 지금까지 일본에서 크고 작은 발표회를 무려 88회나 가진 황씨의 개인전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수많은 재일 한국인들이 다녀갔다.
이번에 옛 우정의 다리를 놓아준 신현동씨는 황씨 작품에 매료돼 있던 일본 나라(내랑)현 가시하라(강원)시 고고학연구소의 한국인 연구원. 신씨는 얼마전 일본을 방문한 북의 친척에게 황씨의 작품 다완을 선물했고 북의 친척이 고향에 돌아가 우씨를 만난 자리에서 남과 북의 도자기 얘기를 하다가 황씨의 작품을 보인 것이 우정의 가교를 놓는 계기가 됐던 것.
우씨의 뜻을 전해들은 황씨의 마음은 물론 반갑고 기뻤으나 마음 한구석엔 썩 내키지 않은 것이 있다고 했다.
『꽃병이 기술적인 측면에선 상상외로 발전돼 있지만 무언가에 쫓긴듯 독창성이 없어 보인다』고 말한 황씨는 『이 도자기를 보낸 우씨의 우정표현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또 이 항아리를 내 자신이 보관해야 할지 좀더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말했다.<이헌숙기자>
1990-12-2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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