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종사 훈련기지」 청진 오인… 그로미코 항의/트루먼 대경실색… 맥아더장군 해임의 계기된듯
소련이 한국전에서 손을 떼게 된 것은 자신과 동료의 소련 비행장 오폭 때문이었다고 6ㆍ25참전 미전투기 조종사 출신인 앨턴 쿠안벡씨가 4일 워싱턴 포스트지에 게재된 기고문에서 주장했다.
미 공군에서 22년간 복무한 후 브루킹스 연구소ㆍ상원 정보위원회ㆍCIA(중앙정보국) 근무를 거쳐 지금은 농장주로 있는 쿠안벡씨는 자신의 오폭이 트루먼 미 대통령의 맥아더 장군 해임에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다음은 쿠안벡씨 기고문의 요지다.
한국전 초기인 1950년 10월8일 나는 같은 편대원인 알 디펜돌프와 함께 북한 상공에서 작전중에 있었다. 고도 3만7천피트의 구름위를 비행하던 우리가 항로를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을땐 우리는 이미 소련 영내로 수마일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F80기를 강하시켜 양쪽에 산을 낀 넓은 하천 계곡을 따라 비행했다. 남동쪽의 해안선을 향해 곧장 날아가면 중소 국경을 바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편대의 오른쪽으로 약 5백야드 떨어진 작은 마을의 한 2층 건물 꼭대기에서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지난 며칠동안 적의 활동을 알리는 신호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는 트럭 1대를 발견한지 약 20초후에 디펜돌프가 『비행장을 봐라. 비행기로 차 있다』고 소리쳤다. 그건 전투기 조종사들이 꿈속에서 그리던 표적이었다. 비행장에는 2차대전중 미국에서 만들어 소련으로 보냈던 P39및 P63형 항공기 약 20대가 두줄로 늘어서 있었고 비행기의 담갈색 동체에는 가느다란 흰 테를 두른 큰 붉은 별이 그려져 있었다.
당초 우리가 부여받은 공격 목표는 한반도 북동해안에 위치한 청진의 한 비행장이었다. 지금 우리 눈아래 있는 비행장은 지표가 단단하다는 청진 비행장에 대한 묘사와 맞아 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는 귀로에 비로소 그곳이 청진이 아니었음을 알고 그렇다면 소련국경에서 20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나진의 불용 비행장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작전완료후 우리는 항공기 1대를 파괴하고 2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으나 몇달후 극동 공군사령부의 한 보고 장교는 『그 비행장이 1주일간 불탔다』고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목격한 화염에 싸인 비행기가 연쇄 폭발을 일으킨 것이 틀림없었다. 이 공격은 즉각 국제적 반발을 샀다.
소련 외무차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2대의 미군 전투기가 소련 국경에서 1백 km 떨어진 소련의 수카야 레츠카 지역을 침범,비행장에 기관총을 난사함으로써 재산 피해를 입혔다』고 항의를 제기했고 미국은 책임을 시인했다.
이 이야기는 1면을 장식했으나 양국 정부는 각자의 사정때문에 곧 잊어 버렸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결정적인 시기에 북한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행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해리 트루먼 미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주한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한 조치와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믿고 있다.
문제의 사건이 터지기 전날 우리 편대는 청진으로 출격했으나 비행장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사건 당일 아침 또 한차례 청진을 정찰 비행했지만 적의 활동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련 국경에 가까운 한반도의 북동부에서 2백명의 북한 조종사가 훈련을 받고있다는 정보 보고 때문에 그때 우리의 모든 관심은 청진에 집중돼었다.
당시 소련은 시베리아와 한반도 북부및 서부 지방의 모든 기상정보를 암호화,우리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우리편대가 이륙하던 날엔 높은 구름이 일어 우리는 고도 3만7천피트까지 올라가 구름 위를 비행했다. 이륙 40분 후 편대장 부드애번스가 엔진이상 때문에 기지로 돌아가겠다고 무선으로 연락해왔다. 디펜 돌프와 내가 구름속에서 처져 20대의 비행기가 앉아있던 소련 국경 부근의 한 활주로 뒤로 가게된 것은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10월8일 오폭사건은 소련 지도층으로 하여금 그들 동부군의 취약성과 현대화된 미공군에 대한 방어의 무력성을 깨닫게 했다. 스탈린은 북한에서 빠져 나오기로 결정했고 우리의 공격이 있은지 2주일 후인 10월 22일엔 모든 추가 원조를 중지시켰다.
워싱턴에선 그 공격때문에 트루먼 대통령이 대경실색했다. 그는 대소전을 촉발시키려는 맥아더의 계산된 행동이라는 의심아래 맥아더에게 책임이 있다고 간주했다. 이 사건 직후에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자신과 웨이크 도에서 회동할 것을 명령했고 6개월후에 맥아더는 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소련이 한국전에서 손을 떼게 된 것은 자신과 동료의 소련 비행장 오폭 때문이었다고 6ㆍ25참전 미전투기 조종사 출신인 앨턴 쿠안벡씨가 4일 워싱턴 포스트지에 게재된 기고문에서 주장했다.
미 공군에서 22년간 복무한 후 브루킹스 연구소ㆍ상원 정보위원회ㆍCIA(중앙정보국) 근무를 거쳐 지금은 농장주로 있는 쿠안벡씨는 자신의 오폭이 트루먼 미 대통령의 맥아더 장군 해임에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다음은 쿠안벡씨 기고문의 요지다.
한국전 초기인 1950년 10월8일 나는 같은 편대원인 알 디펜돌프와 함께 북한 상공에서 작전중에 있었다. 고도 3만7천피트의 구름위를 비행하던 우리가 항로를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을땐 우리는 이미 소련 영내로 수마일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F80기를 강하시켜 양쪽에 산을 낀 넓은 하천 계곡을 따라 비행했다. 남동쪽의 해안선을 향해 곧장 날아가면 중소 국경을 바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편대의 오른쪽으로 약 5백야드 떨어진 작은 마을의 한 2층 건물 꼭대기에서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지난 며칠동안 적의 활동을 알리는 신호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는 트럭 1대를 발견한지 약 20초후에 디펜돌프가 『비행장을 봐라. 비행기로 차 있다』고 소리쳤다. 그건 전투기 조종사들이 꿈속에서 그리던 표적이었다. 비행장에는 2차대전중 미국에서 만들어 소련으로 보냈던 P39및 P63형 항공기 약 20대가 두줄로 늘어서 있었고 비행기의 담갈색 동체에는 가느다란 흰 테를 두른 큰 붉은 별이 그려져 있었다.
당초 우리가 부여받은 공격 목표는 한반도 북동해안에 위치한 청진의 한 비행장이었다. 지금 우리 눈아래 있는 비행장은 지표가 단단하다는 청진 비행장에 대한 묘사와 맞아 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는 귀로에 비로소 그곳이 청진이 아니었음을 알고 그렇다면 소련국경에서 20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나진의 불용 비행장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작전완료후 우리는 항공기 1대를 파괴하고 2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으나 몇달후 극동 공군사령부의 한 보고 장교는 『그 비행장이 1주일간 불탔다』고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목격한 화염에 싸인 비행기가 연쇄 폭발을 일으킨 것이 틀림없었다. 이 공격은 즉각 국제적 반발을 샀다.
소련 외무차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2대의 미군 전투기가 소련 국경에서 1백 km 떨어진 소련의 수카야 레츠카 지역을 침범,비행장에 기관총을 난사함으로써 재산 피해를 입혔다』고 항의를 제기했고 미국은 책임을 시인했다.
이 이야기는 1면을 장식했으나 양국 정부는 각자의 사정때문에 곧 잊어 버렸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결정적인 시기에 북한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행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해리 트루먼 미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주한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한 조치와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믿고 있다.
문제의 사건이 터지기 전날 우리 편대는 청진으로 출격했으나 비행장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사건 당일 아침 또 한차례 청진을 정찰 비행했지만 적의 활동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련 국경에 가까운 한반도의 북동부에서 2백명의 북한 조종사가 훈련을 받고있다는 정보 보고 때문에 그때 우리의 모든 관심은 청진에 집중돼었다.
당시 소련은 시베리아와 한반도 북부및 서부 지방의 모든 기상정보를 암호화,우리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우리편대가 이륙하던 날엔 높은 구름이 일어 우리는 고도 3만7천피트까지 올라가 구름 위를 비행했다. 이륙 40분 후 편대장 부드애번스가 엔진이상 때문에 기지로 돌아가겠다고 무선으로 연락해왔다. 디펜 돌프와 내가 구름속에서 처져 20대의 비행기가 앉아있던 소련 국경 부근의 한 활주로 뒤로 가게된 것은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10월8일 오폭사건은 소련 지도층으로 하여금 그들 동부군의 취약성과 현대화된 미공군에 대한 방어의 무력성을 깨닫게 했다. 스탈린은 북한에서 빠져 나오기로 결정했고 우리의 공격이 있은지 2주일 후인 10월 22일엔 모든 추가 원조를 중지시켰다.
워싱턴에선 그 공격때문에 트루먼 대통령이 대경실색했다. 그는 대소전을 촉발시키려는 맥아더의 계산된 행동이라는 의심아래 맥아더에게 책임이 있다고 간주했다. 이 사건 직후에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자신과 웨이크 도에서 회동할 것을 명령했고 6개월후에 맥아더는 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1990-03-06 5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