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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3선 시장에서 극단적 선택까지

박원순 서울시장…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3선 시장에서 극단적 선택까지

김동현 기자
김동현 기자
입력 2020-07-10 15:13
업데이트 2020-07-1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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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의 박원순 서울시장
집무실의 박원순 서울시장 지난 9일 공관을 나와 연락이 두절된 박원순 서울시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10일 경찰에 따르면 전날 오후부터 박 시장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포착된 북악산 일대를 수색하던 경찰 기동대원과 소방대원, 인명구조견은 이날 0시 1분께 숙정문 인근 성곽 옆 산길에서 박 시장의 시신을 발견했다.
사진은 2014년 재선에 성공한 박 시장이 연합뉴스와 집무실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2020.7.10.
연합뉴스
지난 9일 삶을 마감한 박원순(64) 서울시장은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를 거쳐 서울시 최초로 3선 시장이 된 인물이다. 인권변호사와 시민단체 활동가 출신인 박 시장이 서울의 수장이 되면서 효율성과 도시개발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서울시 행정도 시민참여와 소통 등 새로운 가치를 입게 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날 자신의 전 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를 당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민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박 시장은 1975년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유신 반대 시위에 참여한 이유로 제적된 뒤 단국대에 입학했다.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검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했다가 6개월 만에 변호사로 개업해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렸다. 1988년에는 진보 성향 법조인 모임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인권변호사 시절 권인숙 성고문 사건,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등 성범죄 관련 사건도 변호하며 명성을 쌓았다. 특히 우 조교 사건은 직장 내 성희롱의 개념을 재정의한 사건으로 관련 판례를 바꿨다. 또 미국문화원 사건, 말지 보도지침 사건 등 민주화 운동 관련 변론도 많이 맡았다.

인권변호사로서뿐만 아니라 시민운동 활동가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박 시장은 1994년 참여연대를 설립하고 대기업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 권리찾기’ 운동을 진행했다. 또 부적격 정치인 낙선 운동과 결식 제로 운동 등을 추진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96년에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아름다운재단을 설립하고 사회적기업인 아름다운가게도 함께 설립한 뒤 상임이사를 맡아 사회공헌 활동에 전념했다. 2006년에는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를 만들었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 당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서울시장 보선이 예정되자 출마를 선언했다. 9월 21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시민이 시장입니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박 시장은 지지율 5%로 시작했지만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양보로 단일화를 이뤄 내 야권 단일후보를 거머쥐었다. 무소속으로 야권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해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53.4% 대 46.2%로 누르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이어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도 당시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을 56.1% 대 43.1%로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는 52.8%를 득표해 상대방인 자유한국당 김문수(23.3%) 후보, 바른미래당 안철수(19.6%) 후보를 가뿐하게 누르고 3선에 성공했다.

박 시장 취임 이후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행정, 인사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2011년 10월 취임한 박 시장은 오 전 시장이 반대하던 초등생 무상급식 지원 예산 200억원에 대한 집행을 시작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저 경호용으로 경찰이 무상으로 사용하던 시유지를 회수했다. 또 반값등록금 운동에 적극 호응해 2012년 서울시립대의 등록금을 전년의 50% 수준으로 낮추고 서울시 주요 보직을 개방형으로 바꿔 시민단체를 비롯한 민간인들이 서울시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다는 평가다.

도시계획과 개발에서는 기존 개발 지상주의를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시장은 2012년 2월 개포지구 재건축 사업을 통해 공급되는 주택의 50%를 소형 평형으로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추진했던 뉴타운 사업의 경우에도 주민들의 반대가 있을 경우 지구 지정을 해제하며 ‘도시재생사업’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게 했다. 또 한강변 아파트의 경우 최대 35층 이상으로 짓지 못하도록 규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기존 한강르네상스 개발과 같은 대규모 토목 사업은 줄이고 서울역 고가도로를 리모델링해 ‘서울로 7017’을 만드는 등 기존 건축물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서울의 주택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2018년 정부가 서울시에 그린벨트를 풀 것을 요구하자 미래세대를 위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은 그의 도시에 대한 철학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미래세대를 위한 그린벨트 지킴이를 자처했던 박 시장이 생을 마감하면서, 앞으로 그린벨트가 계속해서 지켜질 것인지는 의문이다.

한편 지난해에는 여의도와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계획 청사진을 발표하는 등 이전과 다른 도시개발에 대한 모습을 보여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도시개발에 대한 입장이 바뀐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 서울시장으로 살아 온 박 시장은 2020년 7월 9일 생을 마감했다. 사망 전날 박 시장은 전 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 당했다. 경찰은 현재 사망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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