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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변호사·시민운동가… “직업이 서울시장”이라 했던 원순씨

인권 변호사·시민운동가… “직업이 서울시장”이라 했던 원순씨

이민영 기자
이민영, 김동현 기자
입력 2020-07-10 02:40
업데이트 2020-07-10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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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수 3선 시장’ 박원순이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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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당시 서울시장 예비후보였던 박 시장이 서울 성북구 숭덕초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2011년 9월 당시 서울시장 예비후보였던 박 시장이 서울 성북구 숭덕초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사상 첫 3선의 최장수(3180일) 서울시장이었던 ‘원순씨’. 진보 경제학자인 우석훈은 박원순(64) 시장을 가리켜 “참여연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한국 시민단체의 상징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고 했다. 삶의 궤적을 관통했던 인권변호사와 시민사회운동가, 그리고 2011년 10·26 보궐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후에도 그는 자신의 꿈을 좇는 일 중독 시장이었다.

박 시장은 지난 6일 자청했던 세 번째 임기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마이크를 잡자 마자 “임기가 9년이 되다보니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서울시장이 박원순이어서 ‘저 분이 직업이 서울시장인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보냈던 ‘시장의 시간’을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많은 시민들의 삶과 꿈을 회복시키는 시간이었다”며 답했다. 누구도 그의 임기가 극단적 비극으로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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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실종된 박원순 서울시장이 10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10년 가까이 여권의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박 시장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문재인(왼쪽)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박 시장이 2015년 5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 식당에서 단독 회동을 마친 뒤 협의 내용을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딸에게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실종된 박원순 서울시장이 10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10년 가까이 여권의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박 시장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문재인(왼쪽)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박 시장이 2015년 5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 식당에서 단독 회동을 마친 뒤 협의 내용을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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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4년 참여연대의 산파역을 했고,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사무처장으로 일하며 시민사회 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95년 사법개혁운동, 1998년 소액주주운동, 2000년 낙천·낙선운동 등 민주주의의 양분이 됐던 시민운동마다 그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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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6일 안철수(오른쪽) 당시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 광화문 세종홀에서 서울시장 선거 불출마와 박 시장 지지 선언을 한 뒤 포옹하고 있다. 서울신문DB
2011년 9월 6일 안철수(오른쪽) 당시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 광화문 세종홀에서 서울시장 선거 불출마와 박 시장 지지 선언을 한 뒤 포옹하고 있다.
서울신문DB
박 시장은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 고(故) 조영래(1947∼1990) 인권변호사와 활동하며 뒤를 이었다. 1988년 진보 성향 법조인 모임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 회원이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미국 문화원 사건에 이어 1990년대 중반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직장 내 성희롱의 개념을 재정의하며 판례를 바꾸기도 했다. 1988년 진보 성향 법조인 모임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 회원이었다.

1996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수상, 2002년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기업인 아름다운가게를 함께 설립한 뒤 상임이사를 맡아 사회공헌 활동에 전념했다. 2006년에는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를 만들었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 당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서울시장 보선이 예정되자 출마를 선언했다. 9월 21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시민이 시장입니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지지율 5%로 시작했지만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양보로 단일화를 이뤄 내 야권 단일후보를 거머쥐었다. 무소속으로 야권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이후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53.4% 대 46.2%로 눌렀다. 2011년 10월 27일, 당시 만 55세의 시민운동가 출신의 원순씨는 ‘서울특별시장’으로 2014년 6·4 지방선거, 2018년 6·13 지방선거까지 집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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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입문하기 전 시민운동가 시절인 2008년 12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씨가 마련한 수다공방 패션쇼 무대에 올라 옷 맵시를 뽐내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에 입문하기 전 시민운동가 시절인 2008년 12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씨가 마련한 수다공방 패션쇼 무대에 올라 옷 맵시를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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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장 취임 후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행정, 인사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박 시장은 1기 첫 해 오 전 시장이 반대하던 초등생 무상급식 지원 예산 200억원에 대한 집행을 시작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저 경호용으로 경찰이 무상으로 사용하던 시유지를 회수했다. 또 반값등록금 운동에 적극 호응해 2012년 서울시립대의 등록금을 전년의 50% 수준으로 낮췄다.

도시계획과 개발에서는 기존 개발 지상주의를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시장은 2012년 2월 개포지구 재건축 사업을 통해 공급되는 주택의 50%를 소형 평형으로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한강변 아파트의 경우 최대 35층 이상으로 짓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기존 한강르네상스 개발과 같은 대규모 토목 사업은 줄이고 서울역 고가도로를 리모델링해 ‘서울로 7017’을 만드는 등 기존 건축물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서울의 주택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2018년 정부가 서울시에 그린벨트를 풀 것을 요구하자 미래세대를 위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은 그의 도시에 대한 철학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임자인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오세훈 시장의 광화문광장 등과 같은 ‘한 방’이 없다는 지적에 박 시장은 항상 “그게 정치적으로 맞는지는 몰라도 나는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내 삶을 바꾸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고 맞서 왔다. 박 시장이 마지막으로 직접 발표한 정책은 지난 8일 ‘서울판 그린뉴딜’이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2020-07-1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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