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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콜하고 메일 받고… 어디까지가 ‘파와하라’입니까

모닝콜하고 메일 받고… 어디까지가 ‘파와하라’입니까

김태균 기자
입력 2020-06-21 17:42
업데이트 2020-06-22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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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생생리포트] 日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해보니

도요타서 괴롭힘 관련 사고, 산재 인정
기업은 상하·동료 괴롭힘 방지책 제정
1차 어기면 지도… 2차 땐 이름도 공개
코로나로 재택근무 늘면서 갈등 증폭
평생고용·집단주의 센 日 조직문화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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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을 맞아 식사를 하러 이동하는 일본 도쿄 중심부 히비야 업무지구의 직장인들.
점심시간을 맞아 식사를 하러 이동하는 일본 도쿄 중심부 히비야 업무지구의 직장인들.
“지각을 많이 하는 부하 직원에게 어느 날 ‘왜 항상 이렇게 늦지? 책임감 따위는 없는 거야?’라고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서 따끔하게 몇 마디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직원이 ‘이거 상사의 갑질 아닙니까’라고 받아치더군요. 정말 거기에 해당하는 건가요?”(40대·이하 모두 일본 회사원)

“한 달에 두 번 오전 7시 회의가 있는 날이면 저는 모든 부서원에게 기상 모닝콜 전화를 넣어야 합니다. 윗분은 저에게 이걸 시키면서 ‘업무의 일환’이라고 하는데, 그게 맞나요? 사람들을 깨우는 그 새벽 시간은 업무 시간도 아닌데 말이죠.”(20대)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는데 아침마다 상사로부터 ‘자료는 반드시 오후 5시까지 제출할 것. 오후 2시 온라인 회의 시간 절대엄수. 재택근무에서는 더욱 뚜렷한 성과가 요구됨’과 같은 메일이 들어옵니다. 매일 똑같은 문자 잔소리에 너무 짜증이 나는데, 대책이 없을까요.”(30대)

이달 1일부터 일본 대기업의 인사·노무 담당부서가 바빠졌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가 법률(노동시책종합추진법)로 의무화됐기 때문이다. 이 법률은 흔히 ‘파와하라 방지법’으로 불린다. 파와하라는 지위 등을 이용해 횡포를 부리는 것을 뜻하는 영어 조어로 ‘파워’(힘이나 지위)와 ‘해러스먼트’(괴롭힘)를 결합해 일본식으로 부르는 말이다.

이 법은 파와하라를 ‘우월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업무상 필요 범위를 넘어 노동자의 취업환경을 해치는 언행’으로 정의했다. 구체적인 지침으로 신체적 공격, 정신적 공격, 인간관계로부터의 단절 등 6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기업은 상하·동료 간 괴롭힘 방지에 필요한 대책을 반드시 수립해야 한다. 2022년부터는 중소기업에도 적용된다. 법을 어기면 당국에서 1차로 지도에 나서고 그래도 고쳐지지 않으면 기업 이름을 공표한다.

일본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 때문에 휴직, 퇴사는 물론이고 극단적 선택까지 하는 사례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28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도요타자동차 사원에 대해 “직장 내 괴롭힘이 자살의 이유가 됐다”며 산업재해 판정이 내려졌다. 도쿄대를 졸업하고 2015년 4월 도요타에 입사한 이 직원은 “너 같은 건 죽는 게 낫다” 같은 상사의 지속적인 공격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파와하라 방지법 시행으로 현장에서는 기대감과 함께 혼란도 나타나고 있다. 어떤 게 ‘적절한 충고나 조언’이고 어떤 게 ‘상처 주고 괴롭히는 말과 행동’인지 구분이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재택근무 관련 갈등과 불만도 부쩍 늘었다. 직장문화 연수업체 임프레션러닝 관계자는 요미우리신문에 “재택근무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3월부터 이와 연관된 고민 상담이 늘었다”며 “메일이나 채팅의 경우 문장만으로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고 생각되면 전화를 직접 걸어 대화로 푸는 게 좋다”고 말했다.

2018년 일본 전역의 노동청에 접수된 약 32만 3000건의 직장 내 분쟁 상담 가운데 ‘괴롭힘·따돌림’이 약 8만 3000건으로 가장 많았다. 일본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이 다른 나라보다 한층 더 광범위하고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 이유로 일본 특유의 직장 및 조직문화가 지목된다. 우선 ‘평생고용’의 개념이 강해 전직(轉職) 등 이동이 활발하지 않다 보니 상사와 부하 또는 동료 간 문제가 조직 내에서 곪은 상태로 계속 유지되기 쉽다. 집단주의와 팀워크가 유별나게 강조되면서 상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부하 직원들이 느끼는 정신적 압박이 크다는 점도 이유로 꼽힌다.

야마나카 도시유키 고베정보대학원대학 교수는 “일본 기업에서는 개인의 직무 범위가 애매하게 설정돼 있는 경우가 많고, 이는 상사가 한층 광범위한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며 “그렇다 보니 원래의 직무 범위에서 벗어난 명령도 부하 직원들이 거부하기 힘든 구조가 형성돼 있다”고 지적했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2020-06-2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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