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를 넘어 현역 활동… 한일 재계에 큰 족적 남긴 ‘창업1세대’

입력 : ㅣ 수정 : 2020-01-19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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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누구
1941년 스무살에 일본 건너가 기술 택해
와세다고등공업학교 졸업 후 사업 시작
27세 껌 제조업 손 대… 이듬해 롯데 출발
제과·호텔·쇼핑 앞세워 70년대 10대 재벌

근면·마케팅 감각 갖춘 ‘타고난 장사꾼’
경영 철학은 ‘화려함 멀리하고 실속 추구’
최고층 건물 건립 꿈 ‘롯데월드타워’ 실현
신 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롯데그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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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롯데그룹 제공

일제강점기 가난한 고향을 떠나 현해탄을 건너는 19세 청춘의 주머니엔 달랑 83엔뿐이었다. 혈혈단신으로 밤낮없이 신문을 돌리고 우유를 배달하는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돈만 생기면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처럼 작가가 되고 싶은 문청(文靑)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출신의 배고픈 젊은이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사치스런 꿈이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다른 자질이 있었다. 부지런했고 약속을 잘 지켰으며, 무엇보다 세상을 읽는 눈이 밝았다. 19일 타계한 롯데 신격호 명예회장은 이 세 가지를 밑천 삼아 맨손으로 거대한 유통제국을 세운 ‘거인’이다.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한국에 진출, 90개 계열사에 총 매출 95조원의 재계 서열 5위(공기업 제외)로 롯데를 키워냈다. 특히 신 회장은 다른 창업 1세대들과 달리 한일 양국 재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최고령 경영자로서 세기를 넘어 현역으로 끝까지 활동했다는 점에서 더욱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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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1921년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 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울산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경남도립 종축장에서 기수보로 일하던 그는 1941년 일본행 관부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고향 처녀(노순화)와 가정을 꾸린 상태였다. 그가 떠난 이듬해,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복지재단 이사장이 태어났다. 노 여사는 남편의 금의환향을 끝내 보지 못하고 1951년 29살에 요절했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기술을 택했다.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 이학부) 화학과를 나와 1944년 군수용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제조공장을 차리면서 첫 사업을 시작했다. 하나미쓰라는 일본인 노인이 대준 거금 5만엔이 종잣돈이었다. 하나미쓰가 ‘조센징’으로 괄시받던 식민지 청년에게 선뜻 호의를 베푼 것은 그의 남다른 성실함과 신용 덕분이었다. 고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유를 정확한 시간에 배달하기로 유명했다. 소문이 퍼져 주문이 늘면서 배달 시간을 못 맞출 지경이 되자 직접 배달 아르바이트를 고용했을 정도였다.

야심 차게 시작한 사업은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두 번의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되면서 쓴맛만 안겼다. 좌절도 잠시 일본 패망 직후인 1946년 5월 ‘히카리(광) 특수연구소’란 사업장을 열었다.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라 비누와 포마드 등의 화장품은 만들자마자 불티나게 팔렸다. 1년도 채 안 돼 적지 않은 돈을 거머쥔 그는 27세 때인 1947년 친구의 권유로 껌 제조업에 손을 댄다.
신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1979년 12월 17일 롯데쇼핑센터 개장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롯데그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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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1979년 12월 17일 롯데쇼핑센터 개장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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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인 마케팅 감각과 문학청년의 감수성까지, 그는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놀이감이 부족했던 전후 상황을 간파해서, 껌을 심심한 입을 즐겁게 해주는 장난감으로 바꿨다. 풍선껌 포장 안에 놀이용 대롱을 함께 넣어 파는 발상의 전환으로 히트를 쳤다. 껌 포장지 안에 추첨권을 넣어 당첨된 사람에게 1000만엔을 준다는 광고도 했다. 당시로선 생각하기 힘들었던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이러한 성공을 발판으로 1948년 신주쿠 허허벌판에서 직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가 출발했다. 회사명은 그가 탐독하던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왔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 최대의 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1989년 7월 12일 열린 서울 잠실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모습. 롯데그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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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1989년 7월 12일 열린 서울 잠실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모습.
롯데그룹 제공

고국을 떠난 지 20여년 만에 성공한 재일교포 기업인으로 우뚝 선 고인은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하며 국내에 본격 진출했다. 일각에서는 “조국에서 첫 투자가 고작 소비재 사업이냐”는 비판도 나왔다.

훗날 그는 “당시 정부는 내게 종합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후지제철소(현 신일본제철)의 도움을 받아 설계도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직접 제철소(포항제철)를 짓겠다고 했다”고 항변했다.

제과·호텔·쇼핑 등 삼두마차를 앞세워 외식, 중화학공업 분야로 뻗어가며 몸집을 키운 롯데는 1970년대 말 10대 재벌에 진입했다. 외환위기가 닥쳐온 1997년 이후 롯데는 인수합병을 통해 사업을 다각화하고 공격적인 경영을 통해 재계 5위로 덩치를 불렸다.
신동빈(왼쪽에서 세 번째) 롯데그룹 회장이 1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아버지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빈소로 들어가고 있다. 신 회장은 이날 일본 출장 중에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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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빈(왼쪽에서 세 번째) 롯데그룹 회장이 1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아버지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빈소로 들어가고 있다. 신 회장은 이날 일본 출장 중에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신 회장은 2011년 둘째 아들 신동빈 회장을 그룹 회장에 올리고 자신은 총괄회장 직을 맡았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셔틀경영을 이어오던 그는 일본 대지진 이후 한국에 머물렀다.

신 회장의 검박함은 재계 안팎에서 늘 화제가 됐다.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그는 늘 ‘거화취실’(去華就實)을 금도로 삼았다. ‘화려함은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하라’는 의미로 모교인 와세다 대학의 교훈이다. 롯데가 언론에 많이 나서지 않는 것도 본업을 잃으면, 화(華)에 많은 자원이 투입될 수 있다는 그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매장 방문 때도 유난을 떠는 직원들에게 불호령이 내려졌다. “내가 손님보다 더 크냐”는 것이다.

고인의 고향 사랑도 남달랐다. 1969년 고향인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일대가 대암댐 건설로 모두 수몰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당장 ‘둔기회’를 조직하고 1971년부터 마을잔치를 열었다. 해마다 5월이면 빠짐없이 행사가 열렸고 초기 40여명이던 참석자는 해를 거듭하며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가세해 1000여명으로 크게 늘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2017년 12월 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횡령·배임 혐의 선고공판이 끝난 뒤 휠체어를 타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신 회장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고령에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을 면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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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2017년 12월 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횡령·배임 혐의 선고공판이 끝난 뒤 휠체어를 타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신 회장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고령에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을 면했다.
연합뉴스

고향 못지않게 그에게는 애틋한 대상이 있었다. 파리 에펠탑 같은 세계 최고층 건물 건립은 ‘필생의 꿈’이었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한국에는 구경거리가 별로 없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시설을 조국에 남기려는 뜻밖에 없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언제까지나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2017년 5월 완공된 국내 최고층 빌딩인 서울 잠실 123층짜리 제2롯데월드타워 꼭대기에 올라 3시간 동안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숙원을 풀었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2020-01-2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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