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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의 노동을 묻는다] 선거와 노동

[이윤경의 노동을 묻는다] 선거와 노동

입력 2019-12-29 21:22
업데이트 2019-12-30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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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 토론토대 사회학과 교수
이윤경 토론토대 사회학과 교수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제도는 대의(代議) 민주주의라서, 사실 시민이 원하는 다양한 소망을 실현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시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핵심적 기회는 자신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인데, 따라서 ‘어떤’ 선거제도를 통해 시민의 이해관계를 정치 과정에 반영할 수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선거제도는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정치적 대표권을 갖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중요한 선거법 개정이 더불어민주당과 4개 야당에 의해 합의되고 통과됐다.

선거제도는 효과적 대의를 위해 추구해야 할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 번째는 유권자와 대표자 사이의 책임성이다. 이는 내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구이고 그의 정치적 공과가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지역구 제도를 통해 잘 실현된다. 두 번째는 다양한 정치적 의향이 제대로 반영되는 비례성이다. 소수 정당, 신생 정당(또는 그 후보)에 투표해도 그 지지도에 따라 의석이 배분되는 비례제가 필요한 이유이다. 세 번째는 투표를 행사하는 주권자 입장에서 투표의 결과가 어떻게 의석으로 전환되는지 이해하기 쉬운 명료한 제도여야 한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도 이 세 가지 원칙을 균형 있게 실현하는 완벽한 선거 제도는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 선거법 개정이 끊임없이 논의되는 이유는, 다수 투표로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지역구 중심의 선거제도가 한두 개 기성 정당, 거대 정당의 후보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문제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권자와 대표자 사이 책임성은 높은 반면 다양한 정치적 의향은 사표화하는, 비례성은 매우 약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비례성이 약한 선거제하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돼 있는 노동자, 여성 및 다른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의 진정한 정치적 대표자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비민주적인 제도이다.

여기서 문제는 선거법 제정과 개정이 기성 국회의원 손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선수들이 자신이 뛸 경기를 앞두고 경기의 규칙을 정하는 식이니, 말 그대로 기성 정치인들의 이해타산에 기초한 힘 싸움이 되고 만다. 사실 한국에서 의미 있는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진 것은, 국회의원이 아닌 시민단체와 노동운동에 의한 것이었음을 상기해 보자. 비례대표 명단의 50%를 여성으로, 그것도 홀수 순번제로 의무 추천하는 여성할당제도는 여성운동의 전방위 캠페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 결과, 2004년부터 조금씩 늘어난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지난 총선에서 17%까지 증가했다. 2004년 총선부터 도입된 1인2표 혼합선거제 또한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기존 선거법의 높은 불비례성을 지적하며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그 결과 헌법재판소가 국회에 선거법 개정을 강제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2000년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이 2004년 선거에서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번에 민주당과 4개 야당이 합의한 선거법 개정안은 기존 선거제도의 문제를 거의 ‘개정’하지 못했다. 선거연령을 18세로 낮춘 것은 큰 성과이나 나머지 사안은 말 그대로 누더기 개정안이 돼 버렸다. 개정의 핵심 방향은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이는 것인데, 그 결과가 미미하다. 기존 비례대표 47석을 한 자리도 늘리지 못했고, 그중 30석에 제한한 연동형 비례대표도 다수의 소수 정당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가져오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거기에 자유한국당은 비례한국당을 따로 만들어 비례대표 의석을 더 가져가겠다고 나온다.

개정 선거법이 적용되는 내년 총선에서 정의당, 녹색당, 민중당처럼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제도 강화, 성평등, 환경 정의, 사회적 약자 보호와 같은 진보 어젠다를 추구하는 소수 정당이 약진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의 정당 득표율은 전체 투표자의 7%가 넘었는데 비례성이 좋은 제도였다면 정의당은 국회 300석의 7%, 즉 21석 정도를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자독식 중심의 선거제도였기에 6석만을 가져갔다. 크게 달라진 바 없는 불비례한 선거제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밖에 없다. 제도는 정치인과 유권자의 행동반경을 한계 짓지만, 제도를 넘어서는 것은 조직된 시민의 힘이다. 노동자가, 여성이, 환경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보다 넓은 연대로 움직이는 2020년이 되길 바란다.
2019-12-3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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