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 포탄 터지는 소리… 지뢰 폭발로 잃은 다정했던 친구 잊지 못해”

입력 : ㅣ 수정 : 2019-12-26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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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30회) 6·25 참전 인천학생 유세원 인터뷰
1951년 10월 3일 강원도 도솔산에서 해병대 포병대 11연대 3중대 3번포(105m/m Howitzer) 앞에서 인천학도의용대 출신 해병 6기생들의 단체사진. ① 신현남(인천공업중 5학년) ② 사철순(인천중학교 5학년) ③ 정명돌(인천영화중 4학년) ④ 노영남(인천공업중 5학년) ⑤ 주억재(인천해성중 5학년) ⑥ 이상순(인천공업중 5학년) ⑦ 문호영(인천상업중 5학년) ⑧ 김유득(인천해성중 5학년) ⑨ 이용운(인천영화중 4학년) ⑩ 허용환(인천영화중 4학년) ⑪ 이희중(인천중학교 4학년) ⑫ 유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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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0월 3일 강원도 도솔산에서 해병대 포병대 11연대 3중대 3번포(105m/m Howitzer) 앞에서 인천학도의용대 출신 해병 6기생들의 단체사진.
① 신현남(인천공업중 5학년) ② 사철순(인천중학교 5학년) ③ 정명돌(인천영화중 4학년) ④ 노영남(인천공업중 5학년) ⑤ 주억재(인천해성중 5학년) ⑥ 이상순(인천공업중 5학년) ⑦ 문호영(인천상업중 5학년) ⑧ 김유득(인천해성중 5학년) ⑨ 이용운(인천영화중 4학년) ⑩ 허용환(인천영화중 4학년) ⑪ 이희중(인천중학교 4학년) ⑫ 유세원

일시 1999년 5월 16일

장소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 부산식당

대담 유세원(북구지대 감찰부장)

이경종(인천학생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원장 (이경종 큰아들)
1999년 5월 16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찍은 사진.

▲ 1999년 5월 16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찍은 사진.

1950년 6월 25일

6·25 사변 이전 나는 화수동 281번지에서 살고 있었다.

인천에 인민군이 들어와서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의용군(義勇軍)으로 막 잡아갈 때였다. 그때 나도 신변의 위험을 느껴 화수동에서 친구들과 지하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인공(人共/인민공화국의 약자)치하때 어려웠던 지하 땅굴 생활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들은 ‘유문길·사철순·문호영·이용운·허용환·김유득·이희중·신현남·정명돌·노영남·주억재·이상순·유세원’ 이었다. 이들이 후일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로 활동한 핵심 멤버들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어느 날 하루는 포탄 터지는 요란한 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서 쏘아대는 함포탄이 인천 시내에 떨어지면서 터지는 소리였다.

그날이 1950년 9월 15일이었다. 이날 UN군과 국군이 인천에 들어와서 인민군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북구지대

우리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호국활동을 하게 되었고, 인천학도의용대가 창설되어 북구지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도 다 저무는 12월이 되면서 우리 인천학도의용대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단체로 남하(南下)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이었다.
1951년 6월 20일 도솔산 전투를 끝내고 인천 출신 해병 대원들과 함께 찍은 승전 기념사진. 분대장 시절의 유세원(앞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 1951년 6월 20일 도솔산 전투를 끝내고 인천 출신 해병 대원들과 함께 찍은 승전 기념사진. 분대장 시절의 유세원(앞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1950년 12월 18일 남하(南下)

1950년 12월 18일 남하 행진에 참여한 우리들은 안양, 수원을 거쳐서 기차 화물차 지붕에 올라타서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밀양을 지나 마산에 도착 하였다. 마산에 도착해서는 어느 민가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가지고 내려왔던 여비도 다 떨어졌었다.

그런데 “해병대모집이 있다!”라는 소식이 있는 것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 해병대 모집에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들은 해병대 모집장소에 찾아갔다.

1951년 1월 3일 해병대 6기에 지원

해병대 모집 장소는 마산국민학교였다. 그때 시험관들은 우리들을 운동장에 쭉 세우더니 10명씩 조를 짜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게 하고는 1등부터 3등까지만 뽑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때 간단한 학과 시험도 있었다. 이날이 1951년 1월 3일쯤이었으며 그때 나는 합격 되어 마산에서 진해로 걸어가 진해경화국민학교에 들어갔다.

1951년 1월 24일에 우리들은 정식으로 해병대 6기 입대식을 하였다.

1951년 2월 10일이 되어 우리들 6기생 전 훈련과정을 마쳤으며 6기생 중 반수는 보병으로 가고, 그 당시 처음으로 해병대에 생긴 포병과로 반이 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포병과로 배치받아 당시 진해에 있던 육군포병학교로 포병교육을 또 받게 되었다. 이때 포병학교를 마친 나는 다시 미(美)해병대에서 또 포병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후 나는 강원도 최전방으로 배치받았다. 처음 우리 해병대 포부대가 올라가 전투한 곳이 김일성고지와 스탈린고지였다. 그 당시 이 2 고지는 적의 수중에 있었는데 이때 우리 해병대가 뺏는 큰 전과를 올렸다.

1956년 9월 21일에 가서야 만 5년 8개월 만에 나의 파란만장한 군 생활을 마감하고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6·25 전사 인천학생 윤운철

1933년생으로 인천송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영화중학교(현재 대건중고교) 4학년생으로 마산에서 해병6기 입대하여 1951년 7월 17일 입대한지 6개월 만에 17세로 전사하였다.
윤운철의 묘.(1999년 3월 22일 이경종 큰아들 이규원 촬영)

▲ 윤운철의 묘.(1999년 3월 22일 이경종 큰아들 이규원 촬영)

전사한 동네 친구 윤운철을 추모하며

인천에서부터 같이 학도의용대원으로 내려와 6기생으로 같이 입대한 윤운철은 입대한지 6개월 만에 전사했다.

당시 나는 전포대가 돼서 포를 쏘는 직책이고 윤운철은 포를 수호하기 위해 포 전면에서 보초를 서면서 포를 지키는 임무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임무를 한 윤운철은 척후 임무를 띠고 전면 숲속으로 가다가 대인지뢰를 잘못 밟고 그 지뢰 폭발로 전사하였다.

윤운철은 성격이 유하고 온순하며 남하고 이야기할 때에는 말을 가려서 하는 아주 다정다감하고 배려 많은 친구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런 온순한 사람이 왜 먼저 하늘나라로 가야 했는지 안타까운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부디 이경종 이규원 2부자(父子)께서 하시는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발굴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란다.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
하늘땅처럼 오래갈 겨레는 나라에 충성하고 자손만대를 이어갈 집안은 부모께 효도하고 오가는 바람아 이 뜻을 전하거라! -충렬사-

▲ 하늘땅처럼 오래갈 겨레는 나라에 충성하고
자손만대를 이어갈 집안은 부모께 효도하고
오가는 바람아 이 뜻을 전하거라! -충렬사-

유세원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감찰부장

1933년 8월 5일 인천 동구 화수동 출생

1950년 6월 25일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감찰부장(용산중학교 5학년생)

1951년 1월 24일 해병대 6기로 자원입대

군번 : 9210591

병과 : 해병대 포병

1956년 9월 21일 만기 명예 제대
2019-12-26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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