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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포사격으로 무너진 건물… 고향후배 입대한 지 3개월만에 세상 떠나

함포사격으로 무너진 건물… 고향후배 입대한 지 3개월만에 세상 떠나

입력 2019-11-20 17:36
업데이트 2019-11-2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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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29회) 6·25 참전 인천학생 박종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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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4일 부산동신국민학교 부산육군통신학교 유선통신교육 졸업기념 사진. 위 사진속 통신병 전원이 인천 지역 6년제 중학교 중학생 출신이다. 박종근(검정색 원).
1951년 5월 4일 부산동신국민학교 부산육군통신학교 유선통신교육 졸업기념 사진. 위 사진속 통신병 전원이 인천 지역 6년제 중학교 중학생 출신이다. 박종근(검정색 원).
일시 1998년 2월 8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 치과 3층)

대담 박종근(인천학도의용대 5대대 부대대장)

이경종(인천학생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원장 (이경종 큰아들)
1998년 2월 8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찍은 사진.
1998년 2월 8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찍은 사진.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나다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났을 때, 나는 인천공업중학교 5학년생이었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전에 전국학생연맹(우익 학생 조직)으로 같이 학생운동(學生運動)을 하던 이기관, 정연옥 등과 함께 전(全)인천학생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처음 전(全)인천학생의용대를 조직했던 장소는 신흥국민학교 옆 답동 로얄 아파트자리에 있었던 일본식으로 지은 일본 절터였고 우리들은 이끈 의용대장은 인천상업중학교 출신 이계송 형으로 당시 고려대 2학년이었다.

1950년 7월 3일

6·25 사변이 발발하고, 전(全)인천학생의용대를 조직하여 며칠간 정신없이 활동하는 중에도 7월 3일이 닥쳐왔다.

1950년 7월 3일 이날 오후 늦어서인가 숭의동 쪽에서 포 소리가 나면서 인민군 탱크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때 알아보니까 경찰은 이미 철수했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충청남도 공주까지 피난 가서 친척집에 몰래 숨어서 지냈다. 그러던 중에 인민군 치하에서 많은 중학생들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실종되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다.

1950년 9월 15일

친척 집에 숨어서 지내기를 2달이 지나자 인천에서 9·15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즉시 답답하게 숨어 지내던 도피 생활을 끝마치고 인천으로 올라왔다. 7월 3일 인천을 허겁지겁 떠난 지 2개월 반 만이었다.

인천학도의용대 창설

이렇게 어려웠던 피란에서 돌아와 수복된 고향 인천에 돌아와 보니까 인천 시가는 미군이 쏜 함포사격으로 건물들이 무너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시민들의 살림살이도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우리가 활동했던 멤버들은 다시 모여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 학도의용대가 부활 됐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 지역에 지대(支隊)를 설치하고 지대 안에 분대(分隊)를 두었다.

이때 나는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5대대 부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12월 18일

중공군의 참전과 국군과 UN군의 후퇴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가 인천을 철수하여 남하(南下)하는 날이 닥쳐왔다.

나는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제5대대 대원들과 합류했다. 곧 남녀 대원들과 같이 인천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우선 안양을 거처서 수원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제5대대 대원들을 인솔하여, 먼저 부산을 향하여 남하(南下)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구를 거처 결국 마산에 도착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 자원입대 후 참전

마산에 도착해서 구마산 삼일여관에 여장을 풀고 그곳을 인천학도의용대 제5대대 본부로 정하고 연대본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인천학도의용대 이계송 연대장은 대구 육군본부에 인천학도의용대 진로 관계로 출장 중이어서 마산에는 없었다. 그때 해병대에서는 해병 모집을 하였는데 인천학도의용대에서 많이 지원하였다. 처음 지원한 대원들 50여명은 해병대 제5기 특채로 입대하였으며 나중에 지원한 대원들 600여명은 해병대 제6기생들이었다. 그래서 6기생들은 인천기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통영으로 가서 방위군 수용소에 며칠 지내다가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육군 제2 훈련소에 입소 후 훈련을 마치고 정식 군인이 된 후 나는 통신학교로 가서 무선통신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후 571부대 화랑중대 4소대에 배치되었고 1953년 5월 23일 나는 군에서 제대를 하였다.
김길태의 묘.(1934년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동 출생, 인천해성중학교 3학년 때 자원입대, 1951년 4월 15일 횡성에서 전사)
김길태의 묘.(1934년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동 출생, 인천해성중학교 3학년 때 자원입대, 1951년 4월 15일 횡성에서 전사)
6·25 전사 인천학생 김길태

1934년 인천 동구 송림동 122번지에서 출생해 인천해성중학교(현 인천 남중학교, 인천남고등학교의 전신) 3학년 재학 중에 인천에서 출발하여 부산진국민학교(육군 제2훈련소)까지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자원입대해, 1951년 4월 15일 참전 3개월 만에, 16세로 전사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

9·15 인천상륙작전 후 인천학도의용대는 호국(護國) 활동하다가, 1950년 12월 18일 남하하여 자원입대해서 고향(인천)을 위하여 피 흘리며 6·25 전쟁을 치렀다.

이제는 70에 가까운 노령인데, 아직도 인천학도의용대 역사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기록을 남기지 못한 일이 마음 아팠다.

고향 송림동 후배 김길태는 과묵하고 심성이 곧아서 장래가 촉망되었던 우리 동네의 인재였다. 그런데 나와 같이 자원입대한 후, 참전을 하게 되고 입대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전사하여 많이 울었던 생각이 난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

늦었지만 다행히 ‘인천학생스승6·25참전사편찬위원회’ 라는 참전자들의 가슴에 와 닿는 문구를 보고 이제야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가 빛을 찾나 싶어 반갑기 그지없다.

이경종, 이규원 2부자(父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오늘 내 증언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좋은 열매를 거두시기를 빌 뿐이다.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
박종근 ▲인천학도의용대 5대대 부대대장

1932년 8월 19일 인천 동구 송림동 출생

1950년 6월 25일 전인천학생의용대를 이계송,이기관, 정연옥 등과 창립

1950년 9월 20일 인천학도의용대 제5대대 부대대장으로 활동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을 향해 20일간 걸어서 내려감

1951년 1월 10일 부산 육군 제2훈련소 입소

1951년 1월 20일 부산 육군 통신학교 입교 군번 : 0241045 (통신병)

1953년 5월 23일 명예 제대
2019-11-21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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