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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삼의 시시콜콜] 진보 겁박한 진보

[박록삼의 시시콜콜] 진보 겁박한 진보

박록삼 기자
입력 2019-08-02 16:57
업데이트 2019-08-0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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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태극기 자결단’이 지난달 3일 윤소하 정의당 의원에 가한 소포 테러는 지극히 저질스러웠다. 죽은 새, 커터칼, 그리고 조악한 필체로 적은 ‘문재인 좌파독재 특등 홍위병 ××한다’ 등 비난을 퍼부은 편지 등등. 당연히 한국사회 극우세력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국회 안에서 폭력과 불법을 일삼아놓고도 경찰 수사는 거부하는 자유한국당의 모습과 5·18, 세월호 등에 망언을 일삼는 보수정치인들이 이러한 극우 백색 테러의 자양분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붙여졌다.
윤소하 의원실에 협박 소포를 보낸 혐의로 체포된 류모씨가 지난달 31일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경찰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윤소하 의원실에 협박 소포를 보낸 혐의로 체포된 류모씨가 지난달 31일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경찰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놀랍게도 경찰이 붙잡은 혐의자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하 한대련)의 핵심 간부 류모(35)씨였다. 한대련 서울지역 조직인 서울대학생진보연합 운영위원장이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서울 노원구에 사는 류씨는 관악구 봉천동까지 와서 소포를 부친 뒤 돌아가는 길에 7차례에 걸쳐 버스, 지하철 등을 갈아탔고, 옷까지 갈아입어 가며 자신의 행적을 지우고자 했다. 당연히 극우세력의 행위라고 여겼던 정의당과 윤소하 의원조차 그의 신분이 밝혀지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류씨는 경찰에 붙잡힌 뒤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고, 법원은 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면 지난달 31일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류씨는 범행 사실을 부인하거나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대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 탓에 정확한 사실 관계 및 그의 의도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정신병리학적인 개인의 일탈이거나 최근 기승을 부리는 극우세력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하는 ‘기획 자작극’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문제는 일부 진보진영의 구태의연한 습관성 반발이다. 청년민중당은 “CCTV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도 전혀 알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면서 “반일·반자한당 투쟁에 나서는 대학생 진보단체에 대한 공안탄압이고 진보민주개혁 세력에 대한 분열 공작, 공안탄압”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냈다. 류씨의 행위 못지 않게 그 반응 또한 안타깝다. 과거 독재정권 시대에 반복해왔던 진부한 반발이다. 사회의 변화와 혁신을 바라는 책임있는 운동세력이라면 이런 일이 발생할 때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반성과 사과가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면 부당한 누명을 벗기 위해 가열차게 싸워야 함은 물론이다.
지난달 31일 서울남부지법 앞에서 서울대학생진보연합 소속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서울남부지법 앞에서 서울대학생진보연합 소속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0~1990년대 청년 학생은 노동자, 농민과 함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 한국사회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주된 세력 중 하나였다. ‘대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범지식인 그룹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그 시절에 비해 학생운동이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 및 영향력은 현격히 달라졌다. 학생운동 위상 저하의 이유는 다양하다. 전지구적 체제경쟁이 끝났고, 혁명의 세기는 저물었다. 다양성의 가치가 존중되는 만큼 이해관계 또한 다양하게 변화했다. 자신의 삶에 기반하지 않는 운동은 순수하고 낭만적일지언정 다수 대중과 함께하기 어렵게 됐다. 현재 학생운동의 주장과 이념 등 가치체계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성찰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모든 조직과 세력은 도태될 수밖에 없음은 명백한 진리다. 청년학생이 여전히 국가와 인류 미래의 등불임을 확인시켜주기 바란다.

박록삼 논설위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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