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서희는 어떻게 이겼나/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입력 : ㅣ 수정 : 2019-08-02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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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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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잘 아는 옛날이야기를 다시 꺼내 본다. 되새겨 볼 만한 점이 있어서다. 이야기는 10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그들은 중원을 넘볼 만큼 성장했기 때문에 고려는 긴장했다. 대신들은 무조건 항복하자고 주장했다.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자발적으로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는 편이 좋다는 대신들도 있었다. 국왕 성종은 그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평양에는 전쟁에 대비해 쌓아 둔 곡식이 수만 섬이었다. 왕은 그 많은 곡식을 적에게 넘겨주려니 속이 상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되는 대로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도 곡식이 남았다. 왕은 그것을 대동강에 쏟아버리라고 했다.

그때 서희가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에게 군량미가 넉넉한데 왜 포기합니까. 전쟁에서는 군사력이 부족해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적의 허를 제대로 찌르기만 하면 됩니다. 항복하지 마소서.

성종은 서희에게 설득되었다. 그렇구나! 무조건 겁부터 낼 일이 아니다. 우선 우리의 항전의지를 다져야겠다. 그때부터 왕은 결코 항복하지 않겠노라는 자신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자 서희는 다음 단계, 말하자면 2단계로 들어갔다. 이번에 적이 고려를 침략한 목적은 무엇인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소손녕은 고려의 영토를 몽땅 차지하려고 군대를 동원한 게 아니었다. 앞서 고려 광종 때, 생여진을 몰아내고 고려가 설치한 2개의 성 즉 가주(운전)와 송성(정주)이 문제였다.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게 출정 목표였다. 최악의 경우 고려는 두 성을 양보하면 되었다. 하지만 서희는 적의 요구를 들어줄 뜻이 없었다.

그래서 서희는 3단계로 넘어갔다. 장차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확보할 방안이 요구되었다. 곧 결론이 나왔다. 한두 번쯤은 적에게 매운맛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종은 서희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명장 대도수에게 정예병을 주어 거란의 허점을 강타하게 했다. 대도수로 말하면 고려에 귀순한 발해왕자 대광현의 후손이었다. 대도수 부대의 유격전술에 소손녕은 당하고 말았다. 그는 목소리만 높일 뿐 군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사태는 막바지 곧 4단계로 진입했다. 성공적인 협상이라야 했다. 서희의 출구전략은 무엇이었던가. 그는 회담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소손녕과 기 싸움을 벌였다. 상견례를 가지고 티격태격하며 상대방의 기를 꺾었다.

다음으로 서희는 고려의 명분을 세웠다. 당시 요나라는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다. 서희는 그 점을 반박했다. 우리가 고구려의 진정한 후계국가이다. 국호를 고려라 하지 않는가. 게다가 평양은 우리 서울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너희 나라 동경, 네가 통치하는 곳도 본래 우리 땅이다.

그러면서 서희는 요나라와 고려 사이에 웅크리고 있던 여진족을 몰아낸 다음, 그 땅을 고려에 양보한다면 요나라와 고려의 우호가 증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소손녕은 의외의 일격을 당한 뒤라 감히 어쩌지 못하고, 요나라 조정에 처분을 물었다. 강동 6주를 고려에 넘겨주고 대신 양국의 우호를 강화하는 편이 자국에 유리하다는 통보가 왔다(고려사, 열전).

서희는 외교의 귀재다.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만 실상 외교란 세 치 혀만으로 되지 않는다. 실학자 안정복은 그때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일단 싸워 보고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 겁부터 집어먹고 화친을 구하면 적의 업신여김이 끝도 없다. 만약 그때 대도수와 서희가 아니었더라면 적에게 무척 시달렸으리라.”(안정복, 동사강목)

강대국의 조롱을 물리치려면 불요불굴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볼수록 서희 생각이 간절해진다
2019-08-02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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