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숫자 하나 안 바꾸고… 교과서 베껴 출제하는 일반고

입력 : ㅣ 수정 : 2019-07-17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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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학 18문제 중 16개 책 그대로 내
문제제기하자 “학생들 공부 안 해” 해명
우수 학생들 주변 자사고·특목고로 유출
일반고 포기자 늘어 정상적 수업 어려워
“고교교육 정상화 계획·목표 제시 못한 탓”
자율형사립고와 외국어고 등 특목고로 둘러싸인 경기도의 한 일반고에서 교과서의 수학 문제를 숫자 하나 바꾸지 않고 중간고사 문제로 출제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담당 교사는 “이런 방식이 아니면 아이들에게 학습 동기를 부여할 길이 없다”고 하소연했고, 교육청도 “문제 될 게 없다”고 결론 냈다.

16일 교육계에 따르면 경기도에 위치한 한 일반고의 지난 1학기 중간고사 수학시험에서 18문제 중 16문제가 교과서에 있는 문제 그대로 나왔다. 숫자까지 똑같았다. 해당 교사는 교과서 문제 50개를 찍어 주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교 관계자가 이를 심각하게 여기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학교와 교육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해당 수학 교사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해명했고, 학교와 교육청은 이를 받아들였다. 경기교육청은 “교사가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 시험의 성취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교과서를 그대로 베껴 출제한 해당 교사의 무책임이 일차적인 문제이지만, 공교육의 기둥이 되어야 할 일반고의 참담한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학교 주변에는 국제고와 자사고, 과학고, 외고가 포진해 있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 학교 관계자는 “중학교 때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예외 없이 주변 특목고나 자사고로 진학한다”면서 “학업성취도가 낮은 우리 학교 아이들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고민이 많다”고 토로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입시에 매몰돼 황폐화된 고교 교육의 단면을 보여 주는 사례”라면서 “교육 당국이 ‘고교체제 개편’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경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연구소장은 “많은 일반고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이 늘어나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해졌다는 이야기를 한다”면서 “과학고나 외고, 자사고 등에 가지 못하고 일반고에 남은 학생들은 패배의식 속에서 성장할 가능성이 차단된다”고 말했다.

김은정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선임연구원은 “교과서 문제가 그대로 시험에 출제되는 것은 교육의 질적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라며 “중학교 성적이 1~10등인 아이들이 자사고나 특목고로 빠져나간 결과 일반고 학생들은 질 낮은 교육을 받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선임연구원은 “교육 당국이 대입 개편 등 고교 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과 목표를 제시해 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꼬집었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2019-07-17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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