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대통령과 영화/이지운 논설위원

입력 : ㅣ 수정 : 2019-06-25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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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70년 4월 캄보디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4개월간 B29 폭격기가 3600회 출격해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쏟은 것보다 4배 많은 폭탄을 퍼부었다고 한다.

닉슨은 미국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베트남에서 ‘멋있게’ 철군하길 원했다. 캄보디아에 숨어 있는 북베트남군 지휘부를 때리는 일은 그의 의도에 부합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1971년 1월 라오스를 침공하면서도 같은 명분을 내걸었다.

학계에서는 닉슨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 1970년 제작된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Patton)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폴 머스그레이브와 J 퍼먼 대니얼의 논문은 패튼 같은 영화가 대통령의 군사작전 개시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대중문화가 정책 입안자들의 세계관에 끼치는 영향과 그것이 어떻게 그들의 의견과 결론을 바꾸거나 강화하는지’를 조사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소설, 영화, 텔레비전이 생산해 내는 ‘합성 경험’이 독자(시청자)들의 실제 세계에서의 정체성과 믿음을 강제하고, 유도하며, 대체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대중이나 고위 정책 입안자나 몇 개 영역이 중첩된 상황에서는 피차 전문 지식이 없음을 감안할 때, 허구로 제시된 주장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다.

미국 백악관 이스트윙에는 40석짜리 작은 영화관이 하나 있다. 1942년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DR) 대통령이 개인·가족용 영화관으로 만든 것이다. 이후 대통령들이 봤던 영화들은 대개 시기와 함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예컨대 빌 클린턴은 1998년에 44편, 1999년에 40편의 영화를 봤지만 1996년에는 3편, 1997년에는 7편의 영화를 봤다. 르윈스키 스캔들 때문에 정신적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해 보게 된다. 학문적인 논쟁이 영화와 전쟁, 또는 대중문화와 외교 간의 상관관계에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영화 관람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 전 영화 ‘기생충’을 관람했다. 인터넷 기사와 댓글에는 벌써 ‘영화 정치’를 언급하고 있다. “‘암살’, ‘판도라’는 김원봉 서훈과 탈원전 정책 등 정치적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는 대목도 있다.

지금껏 우리 대통령들의 영화 관람은 주로 ‘메시지 전달용’으로 이해됐다. 메시지를 증폭·확산시키는 매개로서의 역할이 더 컸던 셈이다. 거꾸로 영화가 대통령의 메시지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볼 근거가 우리도 있었으면 좋겠다.

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시민 케인’이란 영화를 좋아한다고 한다.

jji@seoul.co.kr
2019-06-2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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