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흰 밤에 꿈꾸다/정희성

입력 : ㅣ 수정 : 2019-06-21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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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봉선 - 大地3 144x365㎝, 지본수묵, 2007 한국화가.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중앙미술대전 대상

▲ 문봉선 - 大地3
144x365㎝, 지본수묵, 2007
한국화가.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중앙미술대전 대상

흰 밤에 꿈꾸다/정희성

좀처럼 밤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해가 지지 않는 사흘 밤 사흘 낮

시베리아 벌판을 바라보며

어떤 이는 징키스칸처럼 말달리고 싶다 하고

어떤 이는 소떼를 풀어놓고 싶어 하고

어떤 이는 감자 농사를 짓고 싶다 하고

어떤 이는 벌목을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거기다 도시를 건설하고 싶은 눈치였다

1907년 이준 열사는 이 열차를 타고 헤이그로 가며

창밖으로 자신의 죽음을 내다봤을 것이다

이정표도 간판도 보이지 않는 이 꿈같이 긴

기차 여행을 내 생전에 다시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데

누군가 취한 목소리로 잠꼬대처럼

“시베리아를 그냥 좀 내버리면 안 돼?”

소리치는 바람에 그만 잠이 달아났다

더 바랄 무엇이 있어 지금 나는 여기 있는가?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에 이르렀지만

아침이 오지 못할 만큼 밤이 길지는 않았다

**

시베리아 횡단열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직통으로 달리면 7박8일 걸린다 하죠. 1995년 가을 모스크바의 벼룩시장에서 낡은 지갑 하나를 샀습니다. 흑백사진 엽서 한 장이 들어 있었지요. 한 소녀의 모습이 찍힌 흑백사진 뒤에 몇 줄의 글이 적혀 있었지요. 우리 가족 모두 당신을 기다려요. 당신을 사랑해요. 우표가 붙어 있고 1905년의 소인이 찍혀 있습니다. 발신지가 예카테린부르크였지요. 편지를 받은 청년은 그 사진을 지갑에 맞도록 잘라 넣고 전선을 이동했을 것입니다. 시베리아 황단열차를 타고 예카테린부르크에 가고 싶습니다.

곽재구 시인
2019-06-2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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