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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일제 아픔 서린 ‘공사관’·한인 애환 함께한 ‘영사관’ 사라진다

[단독] 일제 아픔 서린 ‘공사관’·한인 애환 함께한 ‘영사관’ 사라진다

이경주 기자
이경주 기자
입력 2019-06-12 03:00
업데이트 2019-06-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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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공관법 개정… 제도·용어 삭제

대한제국 독립외교 의지 알린 공사관
1974년 직제에서 없애 사실상 사문화
일본 내 마지막 영사관 1995년 철수


1887년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개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만약 조금이라도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을 욕보이는 것”이라며 독립외교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영국 런던의 서리 공사였던 이한응 선생은 1905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공사관이 폐쇄되자 유서를 남긴 채 음독으로 순국했다. 그는 본래 ‘3등 참서관’이었지만 상관이 여러 이유로 귀국하자 홀로 남아 대한제국을 위한 외교를 펼쳤다. 그가 순국한 런던 얼스코트의 주영 한국공사관 건물은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대한제국부터 일제의 아픔을 오롯이 받아 낸 공사관과 1960~70년대 재외 한국인의 애환을 함께한 영사관이 법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외교부 관계자는 11일 “공사관, 영사관 제도를 현행 법률에서 삭제하는 대한민국재외공관설치법 개정안을 이날 입법예고했다”고 밝혔다. 공사관, 영사관이라는 용어와 함께 법적 설치 근거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공사관은 1974년 외교부 직제에서 삭제됐고 일본 오키나와 나하에 위치했던 마지막 영사관은 1995년 철수됐다. 이후 신설된 공사관 및 영사관은 없으며 현재 재외공관은 대사관과 총영사관, 분관, 출장소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조직상으로는 사실상 사문화된 제도지만 이들 기관은 외교사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대한제국부터 시작된 공사관은 일본에 대항해 마지막까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외교관들의 얼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대한제국은 1800년대 말 스스로 독립국임을 열강에 인식시키고 독립외교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널리 알리려 미국, 유럽 등 곳곳에 상주 공사를 파견했다. 당시 한국에 있었던 열강의 공사관 제도를 빌려 외교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신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독립의 정당성을 알린 김규식 임시정부 대표 등에게 이어졌다.

주로 일본에 많았던 영사관 역시 1960~70년대 재외 한국인의 애환과 함께했다. 당시 외화벌이를 나섰던 많은 한국인이 영사관을 기억한다. 다만 한국의 국격이 높아지면서 영사관은 대사관과 총영사관으로 승격됐고 영사관이라는 명칭 자체가 일본의 영향으로 생겼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멸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2019-06-12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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