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영화] ‘해피 엔드’

영화 ‘해피 엔드’
‘해피 엔드’라는 제목을 단 영화치고 진짜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해피 엔드’도 그렇다. 2017년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던 이 작품은 프랑스의 한 기업가 가문을 중심으로, 겉으로 보이는 그들 세상과 실제 그들 생활의 괴리를 포착해낸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설령 그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가진 상층계급이라 해도. 아니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감춰야 할 것이 그만큼 더 많을 수 있다. 언젠가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밝혀질 테고. 그러니까 이 모든 과정의 끝은 ‘새드 엔드’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는 로랑가(家) 다섯 명의 인물이 중요하다. 회사 창업주이나 지금은 은퇴한 조르주(장 루이 트린티냥), 조르주에게 회사를 물려받아 경영자로 활동 중인 딸 안(이자벨 위페르), 앤의 아들이자 좌충우돌하는 성격의 소유자 피에르(프란츠 로고스키), 조르주의 아들로 회사 운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의사로 일하는 토마(마티유 카소비츠), 토마 전처의 딸로 이들과 같이 살게 된 에브(팡틴 아흐뒤앵). 이 중에서 특히 조르주와 에브에게 눈길이 간다. 할아버지와 손녀가 매우 닮아서다. 성별과 나이를 뛰어넘어 서로의 분신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겠다. 첫째, 조르주와 에브는 인생의 종착지인 ‘죽음’을 늘 염두에 둔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해피’하든 ‘새드’하든 간에 이런 ‘엔드’에 대한 사유를 자기 안에 품은 캐릭터는 내면적 깊이를 확보하게 된다. 두꺼운 삶을 산다는 뜻이다. 조르주와 에브의 생은 단순 명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나머지 인물들은 얇은 삶을 산다. 안은 경제 기계, 토마는 성애 기계로 바꿀 수 있을 정도다. 피에르의 즉흥성이 조금 흥미롭긴 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너무 덜 조명된 탓에 그는 단지 혼란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기능할 뿐이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둘째, 조르주와 에브는 죽음과 관련된 각자의 ‘비밀’을 털어놓는 유일한 사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자기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죄책감, 그로 인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에 대한 환멸, 그리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나날에 대한 공포까지, 85세 노인과 13세 소녀의 감각은 놀라울 정도로 공명한다. 이를 고려하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왜 조르주와 에브가 나와 (스포일러라 공개할 수 없는) 어떤 행위를 공모하고 실행하는지도 납득된다. 이것은 나에게 새드 엔드다. 한데 등장인물들에게도 그럴까. 의외로 그들에게 이 모든 과정의 끝은 해피 엔드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행불행의 판단 기준은 하나가 아니니까. 그런 생이라 두려운 한편으로 다행스럽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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