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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에서 얼어 죽은 친구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추풍령에서 얼어 죽은 친구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입력 2019-05-29 17:14
업데이트 2019-05-30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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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23회] 남하 여학생 유각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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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4년(1951년) 5월 20일 피란의 보금자리
4284년(1951년) 5월 20일 피란의 보금자리 남하 인천 여학생들을 신봉순 교육대장(검은색 별)이 4개월간 보호하고 있다가 인천이 수복이 된 이후에 인천으로 귀향시킬 준비를 마치고 부산육군통신학교(부산동신국민학교) 정문에서 찍은 사진. 흰색 별이 한영희(당시 인천여자상업중학교 3학년). 흰색 원안이 유각순(당시 공립인천여자중학교 3학년).
유각순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 대원 ▲인천여자중학교 3학년생

유각순은 1934년 인천 동구 화수동에서 태어나서, 인천여자중학교 3학년 때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 대원으로 호국(護國)활동을 하다가, 후발대를 따라서 1950년 12월 24일 원저호를 타고 월미부두를 출발하여 부산항에 도착하여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신봉순 교육대장님의 보살핌으로 5개월 머무르다가 1951년 5월 인천으로 귀향하였다.
1997년 8월 6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편집실에서 녹음·인터뷰를 하는 유각순(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
1997년 8월 6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편집실에서 녹음·인터뷰를 하는 유각순(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
일시 1997년 8월 6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편집실

대담 유각순(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치과원장·이경종 큰아들)

6·25사변의 발발과 지옥 같았던 인공치하

6월 25일 전쟁이 났을 때, 나는 인천여자중학교 3학년이었다. 나는 피난을 가지 않았는데, 내 또래 남학생들이 인민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고 실종되어서 전쟁의 비극을 처절하게 느꼈다.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우리 인천을 점령하고 있었던 인민군은 물러났다. 9월 말에 내 친구 한영희(인천여자상업중학교 3학년)가 나를 데리고 가서 소개해 준 곳이 바로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본부였다.

중구지대장은 이용희(인천공업중학교 5학년생)였으며, 그때 대원수는 약 30여명 이었다.

인천학도의용대가(仁川學徒義勇隊歌)

1절 정열과 용맹은 학도의 보배

이 나라의 흥망은 우리의 생명

이 몸을 다 바치어 나라가 흥한다면

우리 학도의용대 죽음으로써

아~ 웃으며 꽃이 되리라

2절 임전무퇴 교우이신 화랑도 정신

거룩하신 십용사 뒤를 받들어

백두산 하늘 높이 태극기 휘날릴 때

우리 학도의용대 보람 있으리

아~ 웃으며 꽃이 되리라

그때 내가 처음 인천학도의용대 본부에 가서 학도의용대가를 익히고 중구지대에 와서 대원들한테 교습을 시켰으며 조회시간에는 내가 직접 지휘를 하면서 인천학도의용대가를 불렀다.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6·25참전 전사 인천학생 박봉춘의 묘를 참배하고 있는 부자(父子) 3대. 왼쪽부터 이경종(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이근표(인천학생 6.25 참전관 부관장), 이규원(인천학생 6·25 참전관 대표)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6·25참전 전사 인천학생 박봉춘의 묘를 참배하고 있는 부자(父子) 3대. 왼쪽부터 이경종(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이근표(인천학생 6.25 참전관 부관장), 이규원(인천학생 6·25 참전관 대표)
1950년 12월 24일 윈저호를 타고 남하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국군과 UN군이 갑작스런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후퇴를 거듭하여 1950년 12월 중순이 되었을 때 인천학도의용대가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이 있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교에 가보니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약 3000명이 모여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따라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1950년 12월 24일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와 여학생들이 지금의 인천역 근처에 있었던 월미부두에서 윈저호라는 배를 타고 부산을 향하여 후발대로 남하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때 배를 타고 남하한 여학생들은 나를 포함해서 약 150명이었다. 서해 바다를 거쳐서 남해를 지나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밴드부는 육군종합학교 군악대원으로 모두 입대하였다. 그리고 우리들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들은 부산육군통신학교로 가게 되었다. 당시 부산육군통신학교에는 우리들보다 먼저 내려와 자원입대한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이 육군통신학교에서 통신병 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사실 그때 인천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내려온 여학생들과 우리들처럼 배를 타고 내려온 여학생들 모두는 딱히 머물 곳이 없었는데, 마침 다행히도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신봉순 교육대장님이 계셨었다.

너무나 고마웠던 신봉순 선생님의 도움

그때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있었던 신봉순 대위님은 8·15 해방 후 공립인천상업중학교에서 과학 선생님을 하시다가 뜻하신 바 있어, 교직을 사직하시고 육사 8기로 임관하여, 그때 마침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교육대장으로 근무 중이셨다. 그런 인연으로 오갈 데 없었던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신 잊지 못할 선생님이셨다.

1951년 5월 말 때쯤, 인천이 수복이 되어서 나는 여러 여학생과 같이 고철을 실어 나르는 한양호라는 배를 부산항에서 타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자원입대하여 전사한 친구들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학생들 30여명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 후 참전하여 몇 명이 전사했다는데, 지금도 그 인천학도의용대 전사 대원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오늘까지도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 전사 학생은 중구 지대에서 같이 활동했던 박봉춘으로 나중에 전사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또한 추풍령역을 지나면서 중구 지대원 중 한 명이 얼어서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부산에서 많이 운 기억이 지금도 난다.

6·25 전사 박봉춘(군번 9210267)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재학 중에 마산에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였다. 1951년 11월 1일 강원도 월산령 지구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

지나간 일들은 모두 희미해지는데, 이상하게도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에서 활동했던 일들은 세월이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고, 더욱 또렷한 기억으로 남는다.

어린 나이에 자원입대하여 나라를 구하려고 전사한 우리 인천 출신 참전 중학생들의 죽음은 잊혀져 가는 것 같아서 더욱 슬프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6·25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24회 계속
인천학생 6·25 참전관 전경 (중구 용동 178) 관람 안내 : 평일 10시~17시, 토요일 10시~15시 공휴일·일요일은 휴관 ☎ 032-766-7757
인천학생 6·25 참전관 전경 (중구 용동 178)
관람 안내 : 평일 10시~17시, 토요일 10시~15시
공휴일·일요일은 휴관 ☎ 032-766-7757
■참전기 23회를 마치며

중학교 때 나라를 지키려고 자원입대하여 전사한 동네 친구들을 기억해주는 살아남은 친구들이 이제는 80대 후반이 되었다.

살아계시는 6·25 참전 인천학생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그 누가 6·25 전사 인천학생들의 나라사랑 마음을 기억해 줄까?

69년전 인천에서는 나라를 지키려고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중학생 소년들이 2000명이 있었다. 그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사한 소년들은 208명이다.

6·25 전사 인천학생 박봉춘을 기억해주는 유각순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2019-05-30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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