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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로 소외됐던 한국여성, 그 궤적 속 한줄기 빛

근대화로 소외됐던 한국여성, 그 궤적 속 한줄기 빛

이슬기 기자
입력 2019-05-09 23:08
업데이트 2019-05-10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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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들여다보니

예술감독·전시 작가 4인방 모두 여성
동아시아史에 비판적 젠더의식 투영
정은영 작가의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
정은영 작가의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
런던 프리즈 아트 매거진은 “자아와 사회에 대해 서양의 근대성이 제안한 것과 다른 이해를 제시하기 위한 의식과 제스처의 역사가 발굴된다”고 적었다. 세계적인 비주얼 아트 거장 조안 조나스는 “어메이징”을 외쳤다.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 개막을 이틀 앞두고 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에서 막을 올린 한국관 전시에 대한 평이다.

‘미술 올림픽’ 베니스비엔날레는 총감독이 직접 큐레이팅하는 국제전(본 전시)과 각 국가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국가관 전시로 나뉜다. 올해는 총 90개 국가관이 구성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커미셔너를 맡은 한국관은 예술감독과 작가 세 사람이 모두 여성(김현진 예술감독, 남화연·정은영·제인 진 카이젠 작가)이라는 특징을 띤다. 이들은 서양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동아시아,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그중에서도 더욱 소외됐던 여성이라는 존재에 천착해 비디오 설치 미술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여성국극 남역배우 이등우와 그 계보를 잇는 다음 세대 퍼포머들의 공연 미학을 보여 주는 다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이다. 빠른 템포의 리듬과 세 개 면에서 표출되는 현란한 영상이 인상적이다. ⓒ정은영
여성국극 남역배우 이등우와 그 계보를 잇는 다음 세대 퍼포머들의 공연 미학을 보여 주는 다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이다. 빠른 템포의 리듬과 세 개 면에서 표출되는 현란한 영상이 인상적이다.
ⓒ정은영
한국관의 제목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영국 헤이워드갤러리 관장인 랠프 루고프가 총감독을 맡은 비엔날레의 전체 주제인 ‘흥미로운 시대를 살아가기를’과 묘하게 상응하는 모양새다. 한국관은 역사 서술의 규범은 누가 정의해 왔으며, 그 역사의 일부가 되지 못한 이들은 누구인지, 동아시아 근대화 역사에 비판적 젠더 의식이 개입될 때 우리는 무엇을 새롭게 볼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정은영 작가는 몇 안 되는 생존 여성국극 남역배우 이등우와 그 계보를 잇는 다음 세대 퍼포머들의 퀴어공연의 미학을 보여 주는 다채널 비디오 설치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을 내놓았다. 클럽에서나 들을 법한 리듬에 세 개의 면을 통해 현란하게 진행되는 영상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이미 배제돼 사람들이 본 적 없는 역사에 대해 시각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작가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의미를 찾기보다 영상 속 배우의 몸짓과 혼연일체가 돼 함께 몸을 흔드는 것이 정 작가의 작품을 즐기는 지름길이다. 정 작가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박정희 정권 당시 여성성에 기인한다는 이유로 탄압받았던 여성국극을 통해 문화적 배제도 정치적 상황과 함께 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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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내에 문을 연 한국관 전경. 예술감독과 참여작가가 모두 여성으로 이뤄진 올해 한국관은 전시 작품이 전부 비디오 설치 미술로 꾸려졌다.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은 오는 11일(현지시간) 공식개막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9일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내에 문을 연 한국관 전경. 예술감독과 참여작가가 모두 여성으로 이뤄진 올해 한국관은 전시 작품이 전부 비디오 설치 미술로 꾸려졌다.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은 오는 11일(현지시간) 공식개막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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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에 자리한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현진(왼쪽부터) 총괄감독과 정은영,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 작가.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에 자리한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현진(왼쪽부터) 총괄감독과 정은영,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 작가.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는,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이 인상적인 제인 진 카이젠의 ‘이별의 공동체’는 제주 바리설화를 근대화 속 여성 디아스포라의 원형으로 해석했다. 영상 속 할머니는 제주 4·3사건의 생존자이자 현역 무당이다. 이 여성이 벌이는 제례 의식과 북 리듬이 화면 전반에 흐르고 이어 한국 내 북한 여성, 카자흐스탄 이주여성, 자이니치 등 다양한 경계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바리’를 단순한 효녀가 아닌 성과 지역, 삶과 죽음의 경계인으로 보고 근현대의 전쟁과 국가주의 속 공동체를 다시 찾으려는 움직임이다.

남화연 작가는 식민, 냉전 속 국가주의와 갈등하고 탈주하는 근대 여성 예술가 최승희의 춤과 삶의 궤적을 사유하는 ‘반도의 무희’, ‘이태리의 정원’을 선보였다. 한·중·일 그리고 분단 이후의 북한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무용가 최승희를 지금 여기의 여성 예술가 남화연이 다시 만난 결과다. 동서양 무용의 가교가 되고자 했던 최승희의 몸짓이 영어 자막과 한국어·중국어·일본어 음성으로 함께 설명된다. 전시관 뒤에 자리한 이태리의 정원은 한·중·일에 뿌리를 둔 식물, 혹은 학명이 동양에서 기원한 식물들 8종을 심었다. 30분마다 한 번씩 최승희가 부른 노래 ‘이태리의 정원’이 흘러나온다. 이태리의 정원에서 만나는 이태리의 정원이다.

한편 비엔날레 기간 베니스에서는 한국관 외에도 한국 미술을 다각도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강서경·이불·아니카 이 등의 작가들은 총 79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하는 본 전시에 초대됐다. 국립현대미술관(MMCA)은 베니스 시립 포르투니미술관에서 윤형근 순회전을, 한국관 근처에서 한국 현대미술 팝업전 ‘기울어진 풍경들-우리는 무엇을 보는가’를 연다. 팔라초 카보토에서는 국내 실험미술의 최전선이라고 불리는 원로 미술가 이강소 개인전이 열린다.

글 사진 베니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19-05-1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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