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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식민지 유산의 올바른 극복을 위하여/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열린세상] 식민지 유산의 올바른 극복을 위하여/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입력 2019-03-17 17:36
업데이트 2019-03-18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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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대통령을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으로 부른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발언으로 여야 대립이 격화하고 있다. 나 원내대표의 발언은 3ㆍ1절 기념사에서 색깔론을 극복하자고 호소한 대통령에 대한 도발이다. 그런데 나 원내대표를 ‘아베의 수석대변인’이라고 비난한 여당의 대응 또한 퇴행적이다. 안 그래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합의 실패의 범인 찾기가 벌어져 일본 주범론이 범진보 일각에서 회자되던 참이다.

작금의 사태는 한국 범보수의 아킬레스가 여전히 북한 인식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대척점에서 범진보의 아킬레스가 여전히 일본 인식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런 소모적ㆍ유아적 논쟁 자체가 식민지 유산의 질곡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근대 국제체제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개별 민족국가는 대내적으로 근대적 사회경제 질서의 확립과 대외적으로 자주적 평등질서의 보장을 불가분 불가결의 기본 요소로 한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전략적으로 근대화와 자주화 동시 달성을 목표로 한다. 근대화 프로젝트와 자주화 프로젝트의 상승 조합이 민족주의의 본래 모습이다.

그런데 19세기 조선에서 두 기획은 상쇄 조합의 함정에 빠졌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자주의 나라’가 돼 근대 국제체제에 편입됐지만, 이는 ‘근대 없는 자주’였다. 그로부터 30여년, 갑신정변·갑오개혁 등의 주체적 근대화가 좌절되고,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됐다. 그로부터 식민지적 근대가 시작됐지만, 이는 ‘자주 없는 근대’였다. 우리 민족주의는 이 ‘가짜 자주’와 ‘가짜 근대’를 동시에 극복해야 했으며, 우리가 벗어나야 했던 것은 ‘근대화와 자주화의 상쇄 조합’이라는 함정이었다.

해방으로 우리는 자주화와 근대화라는 두 가지 프로젝트를 상승 조합으로 이끌어 갈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남한에서 근대화 프로젝트와 자주화 프로젝트는 다시 분열돼 상쇄 조합에 빠졌다. 근대화 프로젝트가 전략이 되면 자주화의 과제가, 자주화 프로젝트가 과제가 되면 근대화의 과제가 주변으로 밀려나 부정됐다. ‘오직 근대화’와 ‘오직 자주화’의 분열과 대립이 해방 후 한국 민족주의를 다시 상쇄 조합의 함정에 빠뜨렸다. 지리적으로도 분열됐다. 한국에서는 ‘오직 근대화’가 주류를, 북한에서는 ‘오직 자주화’가 국시를 이루는 사회가 됐다.

한국에서 ‘오직 근대화’가 주류를 이룬 계기는 사실은 4ㆍ19혁명으로 등장한 장면 정권에서다. 장면 정권은 이승만의 배일 정책과 민족경제 노선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일본 자본에 의한 경제 재건을 시도했다. 친일파가 한일 교섭의 전면에 재등장한 것은 실은 이 시기였다. 5ㆍ16으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이 인맥을 계승해 장면 정권이 시도했던 경제협력 방침의 국교 정상화를 완성했다. 1980년 신군부를 거치면서 ‘근대화’는 한국에서 일종의 신앙이 됐다. 이에 대한 이의 제기가 ‘자주화 민족주의’로 표출하면 ‘자주화’가 유일 노선으로 정착한 북한에 연계해 ‘빨갱이’ 낙인을 붙여 배제했다. 한국에서 ‘빨갱이’ 낙인은 근대화 프로젝트와 자주화 프로젝트의 상쇄 조합이라는 함정의 다른 이름이다.

‘빨갱이’로 몰려 사형 선고까지 받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근대화 프로젝트’와 ‘자주화 프로젝트’가 상승 조합을 창출할 기회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한일 공동선언로 한일 화해를 이루고, 2000년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 화해에 나선 것이 이를 상징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시도한 한일ㆍ남북 화해의 병행노선이 실패한 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위기가 중첩·심화된 것이 2017년의 위기다. 그래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성패는 자주화ㆍ근대화 상승 조합을 창출해 내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자주화와 근대화는 민족주의라는 축의 양 끝에 달린 두 수레바퀴 같은 것이라 두 힘이 같은 방향으로 맞물려 돌아갈 때 민족주의는 전진하며, 반대 방향으로 어긋물려 돌아갈 때 같은 자리에서 맴맴 돈다. 두 힘의 상승 조합을 창출해 한국 민족주의의 질곡에서 빠져나오는 것, 이것이 진정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는 길이자 올바른 친일청산이다.

색깔론에서 벗어나 민족주의의 두 기획을 하나로 엮어 나가자는 데 대통령의 본뜻이 있다고 믿는다.
2019-03-1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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