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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해방촌에서] 공터의 블루스

[황인숙의 해방촌에서] 공터의 블루스

입력 2019-02-25 17:34
업데이트 2019-02-26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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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을 거의 다 올라가는데 공터에서 팝송을 틀어 놓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착실히 깔려서 방심했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아닌 게 아니라 짚어 보니 일곱 시가 채 안 됐을 터였다. 가까이에 노숙인 지원센터 ‘다시서기’가 있어서 드물게 술을 마시는 사람이나 뭔가를 먹는 사람과 마주치고, 드물지 않게 그들의 흔적이 널려 있는 공터다.

“원 웨이 티켓! 원 웨이 티켓! 원 웨이 티켓! 원 웨이 티켓! 원 웨이 티켓 투 더 블루스 우우우우~” 십대 아이들인가. 그러기를 바라며 낭패감을 누르고 용기를 내어 공터에 들어섰다.

10미터 남짓 떨어진 공터 끝 나무 아래 거무튀튀한 옷을 입은 늙수그레한 남자들 너덧이 둘러서서 좀은 건들거리며 흥을 내고 있었다. 하긴 팝송에 심취한 십대라니 옛날 고릿적 얘기지. 요즘 애들은 케이팝이나 가요를 들을 텐데. 화단 앞 돌 위에서 작은 카세트라디오가 그 옛날의 팝송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들이 취해 있긴 하지만 선하고 순한 사람들이라는 판단이 들어서 나는 안심하고 쪼그려 앉아 제설함 뒤의 고양이 밥그릇을 채웠다. 어둠 속의 긴 머리 여인(나)을 의식한 듯한 사람이 목청을 높였다. “내가 옛날에 영어를 썩 잘했는데 말이야. 학원에 다닐 때.” 어떤 이가 노래를 따라 부르고 다들 “원 웨이 티켓!”에 목소리를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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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황인숙 시인
나보다 좀은 나이가 적은 듯한, 비슷한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 그들이나 나나 이런 미래가 기다리는 길에 들어선 게 어느 시점이었을까. 비탈을 내려오면서 그들 모습을 떠올리니 왠지 ‘오즈의 마법사’ 생각이 났다. 겁쟁이 사자, 허수아비, 녹슨 양철 인간…. 나는 도로시가 아니라 저 셋을 합한 것 같은 인간이지. 도로시는 어디 있는가.

내가 본 노숙인은 대개 성정이 양순하다. 거친 사람을 딱 한 번 보았다. 지난해 늦봄 그 공터의 제설함이 치워진 벽 쪽에 쪼그려 앉아 물그릇에 남은 물을 화단 방향으로 끼얹는데 “뭐야!?” 벽력같은 고함이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화단 앞에 몸집 큰 남자가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못 봤어요!” 다행히도 내가 끼얹은 물은 그에게 전혀 미치지 않는 거리에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썩 닦아! 얼른 못 닦아!?” 그는 거기가 흙바닥인지 방바닥인지 분간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귀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려주는 그를 피해 허둥지둥 자리를 뜨면서 매일 와야 하는 장소인데 저 사람이 악감을 품고 있을 테니 큰일 났네 싶었다. 하지만 저 정도로 취했다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맞은 것 같다.

그 공터를 처음 본 게 10년 전이다. 그때 내가 다니던 헬스장이 복지회관 건물 4층에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트레드밀에서 달리는 내 눈에 온통 연두색 철망으로 싸여 있는 이층집이 들어왔다. 운동을 끝내고 찾아가 보니 멀리서 볼 때보다 더 심상치 않았다. 집이나 가구에 쓰이는 온갖 종류의 문과 창문과 울타리가 빽빽이 집에 둘러져 있었다. 틈틈이 덩굴식물이 가지와 잎을 내밀고 꽃도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분명 사람이 기거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그는 대체 어떻게 저길 드나들까.

나 혼자 보기 아까워서 그 며칠 뒤 작가 신경숙과 화가 김점선 선생님을 모셨다. 우리 셋이 두 걸음 너비 골목에서 그 집을 감상하며 건너편 벽에 기대어 있을 때 마침 집주인이 왔다. 김 선생님 또래로 보이는 그는 심상한 모습의 남자였다. 뒤에 듣자 하니 이웃들이 흉물스럽다고 구청에 민원을 넣기도 한 모양이지만 그는 자기 집을 그렇게 장치하는 데 예술가에 방불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잡지에도 소개됐다고 하면서 그 집에 대한 자부심을 보이며 그가 말했다. “내 뜻을 이을 사람이 있으면 이 집을 물려주고 싶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냉큼 나를 그 앞으로 밀며 “얘 주세요, 얘요!” 하셔서 발칵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그 집 바로 위의 그 공터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오게 될 줄이야.

근래 존 버거에게 흠뻑 빠져 있다. 어제는 소설 ‘A가 X에게’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절감했다. 뭐 이렇게 우아한 저항소설이 다 있나. 아름다움만으로도 가슴이 저릿저릿.
2019-02-2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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