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활동사진의 도래

한국영화 100년에 관한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두 회에 걸쳐 그 이전의 역사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활동사진’이라고 불린 서구영화 필름들이 처음 한국에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그리고 다음 회는 영화상설관의 설립을 중심으로 조선영화가 등장하는 기반이 되었을 초기 영화산업의 형성 과정을 알아볼 것이다. 1919년 연극과 영화가 결합된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의 상연을 한국영화사의 기원으로 삼는 것은, 조선인의 첫 번째 영화 제작 경험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즉 단성사라는 극장에서, 조선인들이 만든 영화 필름을 조선인 관객들에게 상영한 사건이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이 만든 영화가 아닌, 서구에서 들어온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점은 언제일까. 이는 서구영화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영화사의 기점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이다.
미국인 여행가 버턴 홈스와 그와 함께 한국에 머물렀던 영화 및 사진 전문가들이 촬영한 서울 풍경의 모습. 1901년경 한국을 여행했던 홈즈 일행은 성 안팎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br>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세계영화사 100년의 기점

영화 매체는 서구 근대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그렇다면 서구에서 발명된 영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잘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만든 짧은 영화들을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유료 상영한 사건을 기점으로 삼는다. 이때 사용된 장치가 그들이 개발한 촬영기 겸 영사기인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였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입장료를 지불한 다수의 대중 앞에서 상영된 것에 영화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점이다. 사실 1889년 미국의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는 영화 필름 재생 장치를 먼저 창안했는데, 이는 스크린 영사가 아닌 한 명씩 들여다보는 방식이었다. 즉 영화 매체의 중요한 성립 조건은 다중의 관람 경험인 것이다. 두 번째는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의 개발을 완료해 영화를 만들고, 이 필름들을 대중 앞에서 상영한 것 모두 1895년 같은 해에 이루어진 점이다. 다시 말해 영화를 발명한 서구의 경우, 제작과 공개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중국이나 일본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어떨까. 일본의 경우 1896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고베에서, 이어 1897년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가 교토에서, 또 에디슨이 스크린용 영사가 가능하도록 만든 바이타스코프(Vitascope)가 오사카에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본인들의 영화 촬영은 1898년 ‘귀신 지장’ 등 단편 트릭영화에서 시작되었다. 한편 중국의 경우 영화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96년 상하이에서였고, 처음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05년 베이징의 한 사진관에서 경극배우의 연기를 촬영한 ‘정군산’을 기점으로 삼는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의 경우 1896년을 시작으로 영화 매체가 수용되었고, 이어 자국인의 영화 촬영 역시 큰 시기적 간격 없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 1919년 조선인 신파극단의 연쇄극에 포함된 영화필름이 공개되기에 앞서, 한국에 유입된 서구영화가 대중에게 상영된 것은 언제였을까.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의 활동사진 광고
●진기한 ‘활동사진’과 만나다

한국에서 언제 처음 영화가 상영되었을까 하는 질문은 영화사가들의 오랜 논쟁거리 중의 하나다. 공식적인 기록을 근거로 들자면 1903년 6월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의 활동사진 광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일반인들에게 돈을 받고 영화를 상영했음을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동대문 안의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한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계속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생생한(生命) 도시, 각종 극적인 장면(劇場)의 절승한 광경이 준비되었습니다. 입장 요금 동화 10전.”

‘활동사진’의 어원은 영어의 ‘모션 픽처’(motion picture)에서 온 것이다. 서구인들은 영화가 소리도 없는 단편영화의 형태로 처음 등장했을 때, 움직이는 그림(motion picture)으로 불렀고 이를 일본이 활동사진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이었다. 당시 한성전기회사를 운영하던 미국인 콜브란은 한·미 간의 갈등으로 ‘전차 안 타기 운동’이 확산되자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우고 전차 이용객을 늘리기 위해 활동사진 상영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1903년 7월 10일자 ‘황성신문’ 기사를 보면, “전차를 타고 온 관객들로 상영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덕분에 매일 밤 입장 수익이 백여원에 달했으며 덩달아 전차표 수익도 올랐다”고 한다. 한성전기회사는 동대문 기계창에서의 영화 상영이 큰 성공을 거두자 이 상영공간을 ‘동대문활동사진소’라는 이름을 붙여 운영한다. 활동사진 상영회는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에 한성전기회사는 서대문 근처의 협률사(전통연희극장으로 이후 원각사가 됨)도 빌려서 상영했는데, 이곳은 영사기에서 발생한 불꽃으로 화재가 나 금방 중단되었다.

대한제국 시기(1897~1910년) 한국 사람들에게 활동사진 즉 영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1901년 9월 14일자 ‘황성신문’의 논설 ‘사진활동승어생인활동’(寫眞活動勝於生人活動)에서 어느 정도 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북청사변(北靑事變)에 관한 활동사진을 보고 난 후 쓴 글로, ‘활동사진’이라는 용어가 발견되는 최초의 문헌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않는다. 사진이란 곧 촬영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것이 배열되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움직이는 그림(活畵)이라 할 만하다.”

당시 한국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받았을 충격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일 것이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했고 불을 때는 화면이면 자기 자리에 불이 옮겨붙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무엇보다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무대 앞으로 나가 볼 수밖에 없었다. 또 하얀 드레스 입은 여자 무용단원이나 합창단원들이 인사를 하는 장면이 비치면 갓 쓰고 도포 입은 관객들이 절을 받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하니, 활동사진의 진기함에 대한 사람들의 놀람과 충격을 어느 정도 짐작케 한다.
미국인 여행가 버턴 홈스와 그와 함께 한국에 머물렀던 영화 및 사진 전문가들이 촬영한 서울 풍경의 모습. 1901년경 한국을 여행했던 홈즈 일행은 성 안팎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버턴 홈스의 한국 방문

구체적인 상영 정보가 기록된 문헌으로는 1903년의 활동사진 상영이 가장 앞서지만, 1896년경에 영화가 처음 소개된 중국과 일본처럼 그 이전에 상영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정도 짚어 볼 수 있다. 먼저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소설가 심훈(1901~1936)이, 1897년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의 혼마치좌라고 하는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극장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고 기록한 것이다(‘조선일보’ 1929년 1월 1일). 이는 전해 들은 말을 기록한 것으로 정확한 사료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며, 일본의 영화흥행사가 한국으로 건너와 일본인 관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상영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다음으로 1901년경 한국을 여행했던 미국인 여행가 버턴 홈스의 여행기를 통해서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기록을 접할 수 있다. 영화와 사진 전문가 등 3~4명으로 구성된 홈스 일행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으며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성 안팎을 다니며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또한 왕족인 이재순의 주선으로 고종에게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움직이는 사진이 보여 주는 진기함에 왕실의 반응은 대단했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홈스 일행을 불러 비단과 족자, 은 같은 하사품을 주고 연희를 베풀어 환대함으로써 최고의 호의를 보였다고 한다. 이는 분명 1903년보다 앞선 상영 기록이지만, 왕실에 한정되었을 뿐 일반 대중을 위한 상영은 아니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홈스는 여행기 ‘서울, 한국의 수도’(Seoul: the Capital of Korea·1901)를 내고, 컬러 슬라이드 및 기록영화와 함께 강연으로 공개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은 버턴 홈스 유산 보존회로부터 기증받은 그의 기행 기록영화 ‘한국’(Korea)을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상이 1901년 첫 방문 때의 기록인지 1913년 두 번째 방문 때의 것인지, 혹은 영상이 혼합된 것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한국영화 100년의 의미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의 경우 대중 상영이 이루어진 시점을 공식적인 기록인 1903년으로만 계산해도 조선인들의 첫 영화 제작과는 16년의 간극이 있다. 극장 상영을 포함해 영화문화 전반을 의미하는 ‘시네마’(cinema)로서의 영화라기보다 ‘필름’(film)으로서의 영화, 즉 영화 제작의 경험을 영화사 100년의 출발점으로 놓았던 결정적인 배경인 셈이다. 확실히 세계영화사 100년을 자국의 영화사와 겹쳐서 보는 일본, 중국과 한국의 영화사 100년에 대한 감각은 다르다. 일제강점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경험한 한국인들이 한국영화 100년의 기점을 설정하는 것에 있어, 우리의 제작 경험을 중심에 놓는 민족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대목일 것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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