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입력 : ㅣ 수정 : 2019-01-09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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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In&Out]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다. 대한민국 올림픽 개최 및 남북 단일팀의 참여, 남북한 관계의 전면적 개선,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의 채택, 북-미 정상회담 등 사건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7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냉전질서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매체들은 2018년 말에 일어난 또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간과하였다. 그 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2018년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인정한 후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와의 친교관계를 단절하면서 동방 정교회 내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는 2018년 말 러시아에서 올레그 넬린 대사제(протоиерей Олег Нелин)를 한국에 파견함으로써 지난 70년 간 중단되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을 재개하려고 하고 있다.

물론, 2006년 평양에 김정일의 지시로 건설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삼위일체 성당, 일명 ‘정백사원’이 있으나 북한의 국가 특성상 선교 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는 2018년 서울에서 재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 기사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대한제국을 선포할 준비를 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으나 그 선교 활동은 1899년 중순 2명의 러시아인 선교사와 1900년 2월 흐리산프 셧콥스키 대수도사제(архимандрит 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싶었던 고종이 1898년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짓도록 서울 정동의 토지 825평을 러시아 외교사절단에 선물하였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외교적 스캔들이 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결국 땅 값을 한국 정부에 환불함으로써 토지를 사실상 구입하였다.
해방된 한국에서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 50주년을 맞이한 한국인 정교도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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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된 한국에서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 50주년을 맞이한 한국인 정교도들의 모습.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00년 4월 9일자 ≪제국신문≫이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최근 희랍교(그리스 정교)는 들어온 지가 수 주일에 불과한데 입교하는 사람이 심히 많다고 하니 어느 교파이던지 천주교(기독교 전반)란 일반적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 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아 정교 신도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은 1903년에 재장비한 선교회 부속 학교에서 열렸고 성 니콜라이堂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한반도와 만주가 전장이 되었다.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년 ~ 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
20세기 전반 페오도시이 신부, 김의한 신부와 조선인 정교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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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전반 페오도시이 신부, 김의한 신부와 조선인 정교도의 모습.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이하였다. 1918년 인민위원소비에트의 ‘국가와 종교, 교회와 학교의 분리에 관한 법령’ 공포로 종교 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그 자산과 토지가 몰수되면서 러시아 정교회가 재정난에 봉착하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조선선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하였고 일본정부로부터 소유권 보호를 받기 위해 그 재산을 일본정교회 재단의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 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당국이 조선선교회를 러시아인 관구장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 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 하의 임시 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 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위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냉전체제가 한반도에서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2차 미소공위 개최시 소련 대표단이 선교회 맞은편에 숙소를 차리고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자 선교회의 대소관계와 관련된 의혹이 심화되고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 신도가 이를 이용하여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
서울 구러시아공사관(사적2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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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구러시아공사관(사적253호).

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 (SCAP)의 지지 하에 일본정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그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현재 아메리카 정교회) 소속의 베니아민 바살리가 대주교(архиепископ Вениамин Басалыга)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정교회의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말 북한으로 추방당하고 만주를 거쳐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선교회는 한국전쟁에서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북미관구 소속의 일본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이탈하고 터키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한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및 동남아시아 주재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글·사진 : 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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