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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사회면] ‘크리스마스 차일드’

[그때의 사회면] ‘크리스마스 차일드’

손성진 기자
입력 2018-12-23 17:36
업데이트 2018-12-24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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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전야는 늘 축제 분위기였다. 기독교·천주교인들은 오히려 조용히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조용히 기도를 드리는 동안 일반인들은 밤을 새우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크리스마스이브 분위기가 늘 이렇게 들뜬 것은 통금과 관련이 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이 금지되던 시절 이날만큼은 통금이 해제됐기 때문에 사람들은 ‘올나이트’를 하며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했다. 업소들은 철야영업을 했으며 특히 ‘댄스홀’은 광란 그 자체였다. “종잇조각으로 만든 관(冠)과 색안경을 뒤집어쓴 댄서들은 거침없는 교성을 연발. 덩달아 손님들은 비틀걸음으로 고함 소리. 손님들은 끝없이 밀려오고 댄서들은 날개 돋은 듯 끌려다니고.”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년 후인 1956년 성탄전야 모습이다(동아일보 1956년 12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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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소란한 밤’이란 제목의 성탄 전야 기사(동아일보 1963년 12월 25일자).
‘고요한 밤 소란한 밤’이란 제목의 성탄 전야 기사(동아일보 1963년 12월 25일자).
1964년 성탄은 사상 최악이었다. 정부 당국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남녀 중·고생 3000여명이 도봉산 계곡과 남산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동틀 무렵 내려온 사건이다. 청소년보호대책위원회 긴급 소집을 부른 이 사건은 “여학생들이 서비스(밥 짓기)를 하고 남학생들이 돈을 모아 산으로 올라간 후 술을 마시고 트랜지스터 음악에 트위스트를 추며 보냈던 광란의 밤”으로 신문들은 대서특필했다. 날씨마저 포근해 서울 종로와 명동으로 쏟아져 나온 인파는 무려 35만명이었다. 이들은 필름을 감아 만든 10원짜리 뿔피리를 불어 대고 가면을 쓴 쌍쌍들이 밤거리를 누벼 가면무도회를 방불케 했다. 도심 거리는 취객들로 넘쳐났고 질서 유지를 위해 기마경찰대가 동원됐다. 순시에 나선 내무장관이 종로3가에서 매춘부에게 소매를 끌리는 해프닝도 벌어졌다(경향신문 1995년 12월 21일자).

1965년 10월에는 서울 시내 산부인과에서는 신생아가 어느 달보다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1964년 성탄 전야에 젊은 남녀의 일탈로 원하지 않은 생명이 잉태됐기 때문이었다. 이때 태어난 아이들을 ‘크리스마스 차일드’라고 불렀다는데 어떤 사람들은 ‘나라의 수치’라고 했다(경향신문 1970년 12월 23일자). 최악의 성탄을 겪은 이듬해인 1965년 성탄 전야는 좀 ‘살벌’해졌다. 명동 등에 경찰이 대병력을 풀어 질서를 유지하고 단속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사회단체들은 ‘조용한 크리스마스 보내기’ 운동을 펼쳤고 어린이들까지 “아빠 엄마 일찍 돌아오셔요”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광란이 통금 해제 때문이라며 통금을 유지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그 이후 성탄 전야 광란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어 갔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2018-12-2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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