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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역주행하는 소설 같지만 민족 정체성 되짚어 봤으면…”

“시대 역주행하는 소설 같지만 민족 정체성 되짚어 봤으면…”

이슬기 기자
입력 2018-12-13 17:50
업데이트 2018-12-14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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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0주년에 장편소설 ‘문신’ 출간 윤흥길 작가

문신 1·2·3 /윤흥길 지음/문학동네/각 408·408·400쪽/각 1만 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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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 작가
윤흥길 작가
신문사에서 일하던 시절 윤흥길 작가의 연재소설 원고를 챙겼다는 김훈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듯이 소설을 짊어지고 그 고통스러운 시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최근 1·2·3권이 출간된 장편소설 ‘문신’은 올해 일흔여섯의 작가가 등단 50주년에 독자들을 향해서 힘껏 내미는 손이다. ‘경박단소’(輕薄短小·가볍고 얇으며 짧고 작음)의 시대. 독자들이 이를 원하고 출판사가 이에 부응하는 시대에 노(老)작가가 내미는 주름진 손. 총 5권인 소설의 4·5권은 내년 상반기에 출간된다.

소설은 황국신민화 정책과 강제 징용이 한창이던 일제강점기 산서(山西) 마을 천석꾼 최명배 가족의 엇갈린 신념과 욕망, 갈등을 그려 냈다. 아버지 최명배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당시 법의 빈틈을 파고들어 막대한 부를 쌓지만, 둘째 아들 귀용은 아버지를 ‘악덕 지주 야마니시 아끼라’라 부르며 사랑채를 턴다. 여기에 ‘기회주의자’ 아버지와 ‘사회주의자’ 동생 모두에게 거리를 둔 장남 부용도 있다. 혼돈으로 가득한 시대,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시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과해 나가는 다종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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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신’은 전쟁에 나가기 전 몸에 문신을 새기는 풍습 ‘부병자자’에서 비롯됐다. 지난 11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작가는 말했다. “학교 선배이신 이규태 선생님 저서 중에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읽다가 부병자자에 눈이 꽂혔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도 6·25 때 동네 젊은이들이 입영 며칠 전 집 떠나기 전에 가족들이 보는 자리에서 팔뚝에다가 ‘일심’(一心) 같은 걸 새기는 걸 봤거든요.” 죽은 몸뚱이라도 고향에 돌아오겠다는 간절한 비원이 부병자자에, 그리고 ‘문신’에 담겼다.

왜 다시 일제강점기일까. 작가는 “어떤 면에선 이 작품이 역주행 소설 같다”고 했다. 글로벌 시대를 얘기하는 지금이더라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해 한 번쯤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민족성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일제 말기가 작가의 주제 의식을 구현하는 ‘최적기’였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신’은 대하소설에는 못 미치는 ‘중하소설’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토지’처럼 그 시대를 다룬 호흡 긴 소설들에 나오는 전형적인 인간상이 등장한다. 지주집에 먹물 아들들, 생각 많고 냉소적인 첫째와 행동파 둘째, 그리고 이들 형제에 자극제가 되는 친척 같은 것이다. 작가는 이 인물들을 살아 숨쉬게 하는 데 많은 공을 기울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야마니시 아끼라’로 개명한 악덕 지주 최명배는 실은 전통과 조상 신위를 끔찍이 여기는 인물이라는 식으로. “최명배는 놀부 같은 인물인데, 놀부가 사실은 못된 인간이지만 어떤 면에선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매력적인 인물일 수가 있죠.”

소설은 전반적으로 다지기 잔뜩 들어간 남도 김치같이 풍성한 맛이다(‘다지기’는 ‘다대기’의 바른 말이다). 한평생 국어사전을 끼고 살았다는 작가의 글답게 곳곳에서 출몰하는 다양한 어휘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런데 또 멈칫할 사위 없이 책장이 막 넘어간다. 문장에 흐르는 유장한 가락 때문이다. ‘둥기당당 쿵덕쿵덕’ 읽으며 뜻을 유추해 보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국어사전에서 찾아보거나 하면 좋겠다. ‘전두엽이 크지 않아 스스로를 범재라 생각한다’는 작가는 실제 이와 유사하게 소설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야심한 시각 AFKN(주한미군방송)을 소리 죽여 보면서 다음 장면을 상상하는 식으로.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18-12-14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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