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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부시 타계] 냉전 종식·걸프전 승리 ‘슈퍼 미국’ 문 열다

[아버지 부시 타계] 냉전 종식·걸프전 승리 ‘슈퍼 미국’ 문 열다

김규환 기자
입력 2018-12-02 22:32
업데이트 2018-12-03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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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 W 부시 前대통령 94세로 타계

18살에 자원 입대… 日에 격추 뒤 구사일생
고르바초프와 ‘몰타 회담’서 미소 냉전 끝
1991년 걸프전 승리했지만 재선엔 실패
2000년 아들 부시 당선으로 ‘父子 대통령’
퇴임 후 정적 클린턴과 초당적 모금 활동
북방외교 지원·국회 연설 한국과도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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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인류에게 ‘냉전 종식’이라는 선물을 남기고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세상과 이별했다. AP 연합뉴스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인류에게 ‘냉전 종식’이라는 선물을 남기고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세상과 이별했다.
AP 연합뉴스
“냉전 종식은 모든 인류의 승리다.”

인류를 핵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냉전을 해체하고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어 ‘팍스 아메리카나’의 문을 열어젖힌 ‘아버지 부시’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별세했다. 94세.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저녁 10시 10분 텍사스주 휴스턴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AP통신 등이 전했다. 파킨슨병으로 투병해 온 부시는 73년간 해로해 온 부인 바버라를 지난 4월 먼저 떠나보낸 뒤 7개월 만에 뒤따라 갔다. 역대 미 대통령으로서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1924년 6월 미 매사추세츠주 밀턴에서 태어난 부시는 2차대전이 터지자 예일대 입학을 앞두고 18살에 자원 입대해 최연소 해군 파일럿으로 종군했다. 일본 오가사와라 해역에서 일본군에 격추된 그는 미 잠수함에 기적적으로 구조됐다. 바버라와 1945년 결혼한 부시는 1966년 텍사스주 하원의원 당선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두 차례 하원의원을 지낸 뒤 유엔 주재 미대사, 미·중 수교 전 베이징 주재 미연락사무소장,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을 역임했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과 겨룬 당내 대선 경선에서 패한 그는 8년간 부통령으로 레이건 정부를 떠받쳤다. 1988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꺾고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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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왼쪽) 당시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91년 7월 31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소 정상회담을 마친 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마주 보며 웃고 있다.  워싱턴 AFP 연합뉴스
부시(왼쪽) 당시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91년 7월 31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소 정상회담을 마친 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마주 보며 웃고 있다.
워싱턴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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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부시(왼쪽) 전 대통령이 2001년 1월 20일 취임식을 가진 아들 부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아버지 부시(왼쪽) 전 대통령이 2001년 1월 20일 취임식을 가진 아들 부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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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아래) 전 대통령이 2009년 6월 12일 85세를 기념해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부시(아래) 전 대통령이 2009년 6월 12일 85세를 기념해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레이건의 뒤를 이어 부시가 198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자 냉전 체제가 요동쳤다. 시대의 흐름을 읽은 그는 취임연설에서 ’강한 미국’을 내건 레이건과 달리 “세계에 좀더 따뜻하고 배려 있는 미국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해 7월 동유럽을 방문해 “자유롭고 하나가 된 유럽”을 호소했고, 비 내리는 부다페스트 광장에선 준비된 원고를 버리고 “마음으로 뜻을 전하고 싶다”고 즉흥연설을 했다. 4개월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2월에는 조건 없이 미·소 정상이 지중해 몰타섬에서 머리를 맞댔다.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1990년부터 소련 대통령 겸직)은 “평화로 가득 찬 새 시대”를 얘기했고, 부시는 “그것이 우리가 만들기로 한 미래의 모습”이라고 화답했다. 그렇게 냉전 체제는 평화롭게 무너졌다.

냉전의 공백을 틈타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1991년 쿠웨이트를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걸프전’에 43만명의 대군을 파병해 승리를 거둔 것은 부시의 치적으로 평가된다. ‘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진행된 걸프전에는 33개국 12만명의 다국적군이 참전했다. 1차 걸프전을 압도적 승리로 이끈 그의 지지도는 90% 가까이 치솟았지만, 경제 부진을 이기지 못하고 “바보야 문제는 바로 경제야”라는 구호를 내건 40대 빌 클린턴에게 백악관을 내줬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노태우 정권 당시 ‘북방외교’를 촉진하는 숨은 지원자 역할을 해 줬다. 노태우 정부는 1990년 옛 소련과 1992년 중국과 잇따라 수교했다. 1991년 9월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이뤄졌다. 그는 대통령 재직 기간 두 차례 한국 국회 연설을 했다. 1989년 2월 첫 방한해 국회에서 북한에 평화적인 메시지를 연설했고, 1992년 국빈 방한 기간에는 북한이 핵시설 사찰을 수용하고 의무를 이행하면 한·미 팀스피릿 군사훈련을 중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부시의 진가는 퇴임한 뒤 빛을 발했다. 그는 자신을 이기고 대통령이 된 클린턴과 당파를 떠나 친하게 지냈으며 2005년에는 클린턴과 동남아 쓰나미 피해 복구를 위한 모금 활동에 함께 참여하며 초당적인 국가원로의 모범적 역할을 보여 줬다.

2000년 대선에서 맏아들 조지 W 부시가 백악관 입성에 성공하면서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 이어 두 번째 ‘부자(父子) 대통령’의 기록을 세웠고, 둘째아들 젭도 플로리다 주지사를 지내는 등 케네디가(家) 못지않은 정치 명문가로 자리매김했다.

세상을 떠나던 날 오전 오랜 동료이자 냉전 해체라는 역사의 물결을 함께 헤쳐 간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이 부시를 찾았다. 기력이 쇠해 밥조차 거르며 잠들었던 그가 눈을 떴다. “베이크, 우린 어디로 가고 있나.” “천국으로 가죠.” “내가 가고 싶은 곳이야.”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2018-12-03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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