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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치하의 땅굴 생활… 헌병 된 후 참전해 무공훈장 받아”

“인민군 치하의 땅굴 생활… 헌병 된 후 참전해 무공훈장 받아”

입력 2018-11-28 17:16
업데이트 2018-11-2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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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7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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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31일 제주도에서 찍은 해병대 사관 제2기 졸업 기념사진. 빨간 화살표는 해병 소위 심선택. 당시 중학생이었던 류문길은 친구 집에서 땅굴을 파고 피난 중이었다.
1950년 7월 31일 제주도에서 찍은 해병대 사관 제2기 졸업 기념사진. 빨간 화살표는 해병 소위 심선택.
당시 중학생이었던 류문길은 친구 집에서 땅굴을 파고 피난 중이었다.
류문길 인터뷰

일시 1997년 10월 17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치과 3층)

대담 류문길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1950년 10월 10일 인천학도의용대 북구 지대 지대장 취임 기념사진.  1950년 9월 16일 북부지구 학도치안대 창설하였고, 1950년 10월 20일 헌병학교 자원입대하여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1963년 10월 1일 명예 제대.
1950년 10월 10일 인천학도의용대 북구 지대 지대장 취임 기념사진.

1950년 9월 16일 북부지구 학도치안대 창설하였고, 1950년 10월 20일 헌병학교 자원입대하여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1963년 10월 1일 명예 제대.
내고향 평안남도 순천

나는 1933년 1월 15일날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8·15해방(解放)을 맞으면서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인천에 살고 있는 이모님을 찾아 어머니와 나는 인천 화수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6·25 사변과 3달간의 땅굴 생활

6·25 사변이 터지고, 인민군은 인천에 쳐들어와서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던 좌익 학생들이 표면에 나서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청소년들과 중학생들을 인민의용군으로 강제로 잡아가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때 숨을 곳을 만들기 위해 허용환, 김유득, 정명돌 등의 친구와 나는 지금 자유 공원의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있는 곳에 땅굴을 파서 인민군 치하의 땅굴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심선택 해병 소위

1950년 9월 15일 UN군이 인천상륙작전 할 때 UN군의 함포사격으로 인천 시내가 많은 피해를 보았다.

9월 16일이 돼서야 우리 해병대가 참전하여 상륙한 것을 알게 되었고, 수색하면서 들어온 해병대에서는 아침 8시쯤에 지금 즉시 주민들은 남녀를 가리지 말고 송현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심선택 해병 소위가 중학생을 따로 집합시켜 놓고 전시하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훈시를 하였다.

심선택 해병 소위님은 1926년 인천에서 태어나시고,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영어선생님을 하시다가 뜻한 바 있어 교직을 사직하시고, 해병 사관 2기로 시흥보병학교에 입교하여 1950년 7월 31일 해병 소위로 임관하여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신 분이었다.

심선택 소위님의 훈시 내용 (부탁의 말)

①학생들은 통일 조국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역군이기 때문에 절대로 보호되어야 한다.

②금번 통일전쟁은 우리 기성세대에게 맡기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여야 한다.

③학생들은 학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 자치 단체를 구성하여 호국활동을 하여야 한다.

④학생들은 경찰이 복귀할 때까지 군(軍)의 지시를 받아 치안 유지에 협조하여야 한다.
왼쪽부터 류문길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지대장, 허용환 조사부장(인천영화중 4학년·군복), 사철순 홍보부장(인천상업중 4학년·사복). 1951년 11월 2일 촬영.
왼쪽부터 류문길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지대장, 허용환 조사부장(인천영화중 4학년·군복), 사철순 홍보부장(인천상업중 4학년·사복). 1951년 11월 2일 촬영.
심선택 해병 소위님의 전사 소식

나는 나중에 “심선택 소위님은 자원입대를 원하는 제자 몇몇을 해병으로 입대하게 하고, 같이 북진(北進)하다가, 1950년 11월 12일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후퇴하는데, 제자 해병대원이 낙오한 사실을 알고 구하려다가 북한괴뢰군의 흉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전사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북부지구 학도치안대의 창설

심선택 소위의 훈시를 들은 우리들은 그 즉시 모임을 만들어 명칭을 북부지구 학도치안대(學徒治安隊)라 짓고 본부는 송현국교 교실 하나를 이용하였다. 우리 학도치안대의 활동 지역이 경인선을 경계로 북쪽 지역이어서 북부지구 학도치안대라고 정하였다.

매일 인천 주둔 해병대 사령부에서 사용하는 암호를 전달받으며, 치안 유지 및 학생 선도 그리고 피난민 안내 등의 호국 활동을 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로 명칭 변경

그 후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가 창립되어서, 명칭이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로 바뀌었다. 이때가 1950년 10월 초였다.

이후 인천학도의용대 본부와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학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를 기다리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학생들을 인천학도의용대 가입을 권유하면서 한편으로는 학생들의 탈선을 막는 데 주력하였다.

중공군 참전으로 헌병 10기 입대

10월에 들어서면서 중공군의 참전 뉴스는 나를 허탈하게 하는 소식이었다.

그것은 곧 남북통일이 되면 내 고향 평안남도 순천에 찾아가려고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허사가 된 것 같아 나는 어쩌나 하고 있을 때인 1950년 10월 중순에 서울에서 헌병(憲兵) 10기생 모집이 있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이때 나는 주억재와 같이 서울에 가서 그 헌병모집에 지원하여 1950년 10월 20일 합격하였다.

국군 제6사단 7연대 최전방에서

내가 헌병 10기생으로 전방으로 전속되어 간 곳이 강원도 전투지역에 있는 제6사단 7연대 최전방이었다. 그 6사단 7연대에 배치된 나는 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무공훈장(武功勳章)을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6사단 헌병대원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군 생활은 최전방에서만 있다가 1963년 10월 1일 날 군 복무를 시작한 지 13년 11개월만에 명예제대하였다.

북구지대 중학생들의 자원입대와 참전

1950년 12월 18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모두가 부산을 향하여 20일간 걸어서 남하하여 1951년 1월 10일 우리 북구지대 지대원들도 거의 대부분 자원입대하고 참전하였다. 그중 몇 명은 전사하였다는 비보(悲報)를 전해 들었다.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출신 전사 학생

박명호 인천공업중 3학년 전사

이중수 인천영화중 4학년 전사

이화식 인천동산중 4학년 전사

조순범 공립인천중 1학년 전사

최춘국 인천상업중 4학년 전사

황하삼 인천해성중 2학년 전사
1998년 2월 28일 이규원 치과 원장이 촬영한 황하삼의 묘.
1998년 2월 28일 이규원 치과 원장이 촬영한 황하삼의 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발굴 소식을 듣고

내가 6·25 사변 때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에서의 활동은 내 평생 최고로 보람된 일로 내 가슴 속에 곱게 품고 지내오고 있었지만 그 한쪽 구석에서는 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인천학도의용대의 호국활동이 전혀 기록으로 남아있지 못하여 늘 마음에 걸렸었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이규원 치과 원장이 6·25 사변으로 인하여 청소년기에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참전한 아버지(이경종·16세 참전)와 아버지와 같이 참전했던 인천학생스승의 6·25 참전역사를 발굴기록하며,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를 편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명을 받았다.

오늘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창설배경과 활동 과정 그리고 자료를 들고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방문하여 이규원 치과 원장을 만나서 자료 일체를 기증한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 해병 소위 고 심선택은

해병 소위 심선택(위 큰 사진 빨간 화살표)은 1926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인천상업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있다가 교직을 사직하고, 해병 사관후보생 2기로 시흥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제주도에서 해병 소위로 임관했다.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고, 인천에서 현지 입대한 제자 해병대원이 낙오된 것을 알고 구하려다가 북한 괴뢰군의 흉탄을 맞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1950년 11월 12일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전사하였다.
2018-11-29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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