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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학생 명단에 오라버니 이름이…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만”

“전사 학생 명단에 오라버니 이름이…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만”

입력 2018-09-26 17:34
업데이트 2018-09-26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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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5회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3학년 2반 진급 기념 촬영
3학년 2반 진급 기념 촬영 1949년(단기 4282년) 7월 26일 6년제 인천공업중학교 3학년 2반 진급 기념 촬영. 빨간색 원 안이 송용식(6·25 전사 인천학생).
사진은 1999년 7월 6일 이종창(6·25 참전 인천학생·파란색 원 안)이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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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의 유골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移葬)한 기록문으로 송용식 참전기를 대신한다.

6·25 전사 인천학생 묘가 인천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중에는 비석도 없고 봉분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실을 되돌아보고, 이제는 고향 인천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잊혀져가지만, 후대에 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억해 달라고 이 참전기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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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활동

1996년 7월 15일 창립된 인천학생스승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가 인천지역 6년제 중학교 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은 208명이고, 전사 스승은 심선택 해병 소위 1명이다.

23년 동안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가 제보를 받거나 혹은 기록을 찾아서 이름과 출신 중학교 등을 확인한 전사 인천학생은 105명뿐이다.

나머지 103명의 전사 인천학생은 이름조차도 알 수가 없다.

전사 학생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여러 차례 서울 동작구 현충로 국립묘지를 찾아 전사자 위패와 묘 그리고 고향 인천 여기저기 묻혀있는 묘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관련 지방자치단체에 기록되어있는 호적 제적등본을 일일이 다 떼어서, 최종적으로 전사를 확인한 결과 그 전사자는 105명이다.

6·25 전사 인천학생 명단에서 오빠의 이름을 찾아보고 통곡하던 할머니 자매

2001년 6월 1일부터 6월 15일까지 인천 중구 자유공원 내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주최로 제3회 인천학생 625 참전 기록사진 전시회를 개최 중일 때 있었던 일이었다.

첫날 두 분의 할머니께서 인천학생스승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경종 편찬위원에게 다가와 울면서 “저기 우리 오라버니 이름이 있습니다”라며 따라가 보니까 전사 학생 명단이 있는 참전 전시판에 할머니들이 가리키는 이름은 송용식이었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경종 편찬위원이 “송용식 전사자의 묘가 따로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지금 오라버니는 서구 검암동 간재울 고향 땅에 묻혀 있으며 우리들은 동생 송옥림·옥란 자매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면서 서럽게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6·25 참전 사진 전시회가 끝나고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송용식 전사자의 묘지를 확인하기 위해 두 자매의 안내로 서구 검암동으로 송용식 전사자의 묘지가 있는 인천광역시 서구 검암동 438-18번지를 찾아갔으나 묘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묘지가 보이지 않는가?”라고 물어보았더니 “우리들이 어릴 때 군에 입대한 오빠가 전사하여 유골로 돌아와 아버지께서 이 근방 양지바른 곳에 묻고 봉분을 잘 만들어 해마다 제사를 드렸었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아무도 돌보지 않아 봉분이 깎여 이리됐다”하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송용식 전사자 묘를 국립묘지로 우리가 옮겨 주겠으니 이장하겠는가?”라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두 자매는 그리하겠다는 뜻을 밝혀 이때부터 묘지 확인 작업을 위해 현장에 직접 검암동 동직원과 같이 유골이 묻혀 있는 지번(인천 서구 검암동 438-18)을 확인하였다.
2003년 5월 27일 6·25 전사 인천학생 고 송용식 유골 이장을 앞두고
2003년 5월 27일 6·25 전사 인천학생 고 송용식 유골 이장을 앞두고 사진 왼쪽 첫 번째 이경종 6·25 참전사 편찬위원(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설립자), 두 번째 송옥림(고 송용식 첫째 여동생), 세 번째 송옥란(고 송용식 둘째 여동생), 여섯 번째 이규원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치과 원장, 이경종 큰아들).
6·25 전사 학생 송용식 이장(移葬)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육군본부에서 이장 허가서를 발급받았다.

2003년 5월 27일 아침 일찍부터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의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건하게 6·25 참전 전사 학생 고(故) 송용식의 유골(遺骨)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어렵게 유골을 찾아 수습한 후 유골함에 담아 제(祭)를 올렸다.
2003년 6월 26일 대전 현충원 고 송용식 이장을 마치고
2003년 6월 26일 대전 현충원 고 송용식 이장을 마치고 앞줄 오른쪽 첫 번째 송옥림(고 송용식 첫째 여동생), 두 번째 송옥란(고 송용식 둘째 여동생).
이규원(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촬영
2003년 6월 26일 대전 현충원 고 송용식 이장을 마치고
2003년 6월 26일 대전 현충원 고 송용식 이장을 마치고 가운데 흰옷이 이경종.
이규원(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촬영
전사한 친구여, 이제는 편히 쉬게나!

2003년 5월 27일 오후에 대전 현충원 봉안관 임시안치소에 모셨다가 2003년 6월 26일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이제는 편안히 잠들 유택(대전 현충원 2묘역 16129)에 안장되었다.

2003년 6월 26일 유골 이장에 참석하신 아버지(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께서 송용식 전사자 묘에서 “중학교 3학년 때 나와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참전하여 전사한 친구여, 자 이제는 편히 쉬게나!”라고 말씀하신 것을 나(이경종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는 들었다.

고향에 돌아온 6·25 전사 인천학생들 유골

6·25 사변 발발 후 한창 전쟁 중일 때 전사한 전사자들은 그 당시 전투가 워낙 치열했기에 정부에서는 일정한 묘지를 정하지 못하고, 화장을 한 뒤에 유골을 직접 유가족에게 전하였다.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 아들의 유골을 받은 부모님들께서는 가슴이 베이는 심정으로 대성통곡하시고는 집 근처 아들이 놀던 양지바른 동산에 곱게 묻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참전기 15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6년제 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중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 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송용식이 학창시절을 보낸 옛 6년제 인천공업중학교(현재 인천기계공고)의 넓은 운동장은 아직도 송용식을 기억합니다.

송용식과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입대하셨던 저의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송용식이 공부했던 인천기계공고 운동장 한편에 송용식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제 고향 인천에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이 참전기에 그 이름 송용식을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으로 기록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 ▲인천공업중학교 3학년 때 자원입대 ▲육군 통신병으로 참전·전사
1946년 6월 20일 인천서곳국교 제1회 졸업 사진 속의 송용식. 1999년 7월 6일 이종창 기증
1946년 6월 20일 인천서곳국교 제1회 졸업 사진 속의 송용식.
1999년 7월 6일 이종창 기증
송용식 전사자는 인천 서구 검암동에서 태어나, 인천공업중 3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자원입대 후 육군통신병(군번 0243043)으로 참전하여 1951년 5월 30일 강원도 양구에서 전사함.
2018-09-27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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