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도서관에 푹 빠진 지도자들/유종필 전 관악구청장

입력 : ㅣ 수정 : 2018-09-12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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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이슈로 가득한 현 시국에 정치인들에게 도서관 이야기를 하면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서관 이야기를 한가한 것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의 위대한 도서관들을 둘러보면서 도서관마다 정치지도자들의 행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기에 하는 말이다.
유종필 전 관악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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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종필 전 관악구청장

‘도서관 공화국’이라 불리는 미국은 대통령들이 퇴임 뒤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관례화됐다. 도서관 마니아인 오바마는 퇴임 2년여 전부터 도서관 건립 계획을 발표하고 10억 달러를 모금했다. 뉴욕, 하와이와 경합 끝에 건립지로 선정된 시카고 잭슨공원을 가 보니 널찍한 터에 잔디가 곱게 자라고 있었다. 2008년 말 그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필자가 만난 미의회도서관 관계자들은 “새 대통령에게 도서관에 대해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인식이 잘 돼 있다”고 했다. 상원의원 시절 전미도서관대회에서 4만여명의 도서관인들을 상대로 한 기조연설을 하여 갈채를 받았던 그는 대통령 당선 뒤 “미드맨해튼도서관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오바마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도서관 친화적 인물이다.

보스턴에 있는 케네디대통령도서관을 찾았을 때 케네디 부부의 드라마틱한 인생과 인기를 말해 주듯 내외국인으로 북적거렸다. 세계 최대 최고의 도서관인 미의회도서관은 주요 건물의 명칭을 애덤스(2대), 제퍼슨(3대), 매디슨(4대) 등 대통령 이름에서 따왔다. 건국 초기 국가 도서관 발전의 초석을 놓은 대통령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라고 한다. 레이건이 그 바쁜 취임 첫해에 본관도 아닌 매디슨관 준공식에 참석한 것을 보면 미국에서는 대통령의 도서관 중시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미테랑국립도서관은 미테랑의 의지와 열정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문화대국 프랑스의 위상에 걸맞은 단일 규모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20층 건물 4개가 지하로 연결된 이 도서관은 미테랑이 신축 계획부터 부지 선정, 설계 당선작 결정까지 전 과정을 주도하면서 무려 40여 차례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오늘의 러시아 판도를 완성한 표트르 대제는 최초의 서구식 도서관인 과학아카데미도서관을, 에르미타주박물관을 있게 한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은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도서관을 설립했다. 무인의 이미지가 강한 푸틴은 2007년 국정 연설에서 전국 도서관의 허브 역할을 하게 될 현대식 디지털 도서관 설립 계획을 발표했고, 후계자 메드베데프가 완성하고 개관식에 참석했다. 러시아 정신의 보고인 러시아국가도서관이 크렘린궁 바로 앞에 위치한 것은 정치권력과 지식의 공존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영국 하원은 도서관 상임위원회를 설치해 의회도서관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데, 상임위원 가운데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 등 총리가 5명이나 배출된 사실은 도서관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의회도서관을 잘 활용한 정치인을 물어보니 대처를 내세운다. 탄탄한 논리에 비해 유머가 약한 대처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험생처럼 도서관에 틀어박혀 연설 준비를 했는데, 장시간 준비한 위트 넘치는 연설을 메모도 없이 함으로써 마치 평소 실력인 것처럼 과시했다고 한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혁명 초기 지식인들이 국외로 대거 탈출하자 남은 지식인들을 국립도서관으로 불러모아 설득하는 연설을 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외국 국가원수를 만날 때도 국립도서관을 즐겨 이용할 정도로 도서관을 가까이했다.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 각각 왕실도서관인 집현전과 규장각을 설립해 지식 통치를 펼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임금의 공통점은 선왕으로부터 ‘건강을 해치니 책을 그만 읽으라’는 금서령(禁書令)을 받을 정도로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권력과 지식이 결합할 때 과거보다는 미래 비전을 가진 민본정치가 가능했으며, 그 혜택은 치자와 피치자 모두에게 돌아갔다. 큰 꿈을 꾸는 정치인이라면 사교 시간을 줄이고 의원회관과 마주 보고 서 있는 국회도서관부터 자주 찾는 것이 어떨지….
2018-09-12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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