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공민왕릉과 남북의 문화유산 보호

입력 : ㅣ 수정 : 2018-09-1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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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고려 건국 1100주년(918~1392)을 맞았다. 고려는 470여 년을 이어온 왕조이지만, 삼국시대나 조선의 역사와 문화만큼 가까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거리감은 고려의 문화유산이 휴전선 너머에 몰려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공민왕릉만 해도 그렇다.
12지신상, 벽화, 공민왕릉, 14세기, 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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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지신상, 벽화, 공민왕릉, 14세기, 개풍

고려말의 공민왕(재위 1351-74)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뤄져 우리에게는 비교적 친숙하다. 그러나 공민왕릉이 1905년에 도굴되었고, 왕릉 내부에 역사적으로 귀중한 벽화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알아도 고려 왕릉벽화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공민왕릉 묘실 내부의 동벽과 서벽, 북벽에는 각각 4구씩 모두 12구의 인물상 벽화가 있다. 묘실 벽에 넓은 화강암 판석을 세우고 회반죽을 바른 뒤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일설에는 그림 솜씨가 좋은 공민왕이 직접 벽화를 그렸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관복을 입고 홀(笏)을 든 인물상은 머리에 12개의 다른 동물머리가 그려진 관을 쓰고 있어 12지신임을 드러낸다. 관에 동물 머리가 표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저 조회에 참석한 문무백관들이라 단정했을지도 모른다.

12지를 미술로 표현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다. 김유신묘를 비롯해 경주의 여러 능에는 12지신 조각을 무덤 주위에 두른 예들이 적지 않다. 흥미롭게도 이 조각들은 모두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지니고 무기를 든 무장의 형상이다. 때로는 갑옷을 입고, 때로는 일상복을 입었을지언정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둘 다 무덤과 관계가 있었으나 한쪽은 능 외부, 다른 쪽은 능 내부로 위치가 바뀌었다. 신라와 고려에서 달라진 동물의 신격화와 의인화는 그에 깃든 사상도 달랐기 때문이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공민왕릉은 노국공주의 정릉(正陵)과 공민왕의 현릉(玄陵) 두 기를 합쳐 현정릉이라고 한다. 1365년에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공민왕이 직접 공주의 능 축조를 지휘하여 9년 만에 완공했다. 공민왕릉의 구성과 건축에는 당시 고려의 수학, 천문, 석조건축 기술이 집대성되었고, 능침제도는 조선 왕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왕릉만 봐도 조선은 고려와 이어져 있음이 확연하다. 문화와 역사는 이처럼 퇴적되며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고려의 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왕릉이 87기 나오지만, 실제 왕이나 왕비릉으로 추정된 곳은 58기에 불과하다. 북한에서 고려 왕릉의 공식 발굴은 해방 이후 20여 차례 이뤄졌다고 한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많은 고분이 도굴되어 유물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고려 왕릉이 이럴진대 휴전선 너머에 있는 문화재의 실상은 우리에게 백지나 다름없다.

대북특사가 오가고 남북협상 진전의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가 그려지고, 남북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남북경제공동체의 구축이 논의된다. 하지만 휴전선 너머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우리의 거리감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다. 오랜 분단으로 남과 북의 문화재 인식, 그 보존 방식과 훼손에 관한 규제가 다르게 구축됐다. 북한 문화재가 도굴되거나 파손되어 ‘탈북’ 대열에 합류한 지 오래다. 남과 북이 이제라도 문화재의 실태파악과 보호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경제와 함께 문화재 협력 방안을 남북협상의 테이블에 올리는 일이 시급하다. 고려건국 1100주년을 맞은 지금이 그 적기이다.
2018-09-1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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