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규방에 갇혔지만… ‘신선의 재주’로 사대부 남성들을 휘젓다

입력 : ㅣ 수정 : 2018-09-11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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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너무 비범해서 비극적이었던 허난설헌
강릉 경포호수 주변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안에 있는 허난설헌 동상. 부친 허엽은 청주 한씨와 사별한 뒤, 강릉 김씨를 재취로 맞아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얻었다. 공원 가까이에 허난설헌의 생가가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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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경포호수 주변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안에 있는 허난설헌 동상. 부친 허엽은 청주 한씨와 사별한 뒤, 강릉 김씨를 재취로 맞아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얻었다. 공원 가까이에 허난설헌의 생가가 복원됐다.

#신선의 재주라고 기려지던 그녀

망국의 치욕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 황현은 우리나라 한시를 통독하고 난 소회를 ‘우리 조선 제가의 시를 읽다’(讀國朝諸家詩)라는 시로 갈무리한 바 있다. 김종직부터 김창흡에 이르는 열네 명을 다룬다. 이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유일한 여성 허난설헌인데, 황현은 이렇게 평가했다.

세 그루의 보배 나무를 둔 초당(허엽)의 집안

제일가는 신선의 재주로는 경번(허난설헌)이었네.

티끌 세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줄 알았음인가

처량하게 달빛 아래 서리가 연꽃에 내려앉았네.

세 그루 나무는 허엽의 아들 허성, 허봉, 허균을 가리킨다. 이들 부자는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명류(名流)였다. 여기에 허난설헌을 더해 ‘허씨오문장가’(許氏五文章家)라 한다. 하지만 황현은 그녀를 신선에 버금갈 만한 재주를 지닌, 그야말로 ‘최고’로 꼽았다.

황현만이 아니다. 심수경도 “허봉과 허균도 시로 이름을 날렸지만, 여동생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신선의 재주를 지녔다고 기려지던 허난설헌은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황현도 그녀의 요절을 ‘서리 맞아 떨어진 연꽃’에 비유하며 안타까워한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허난설헌은 어느 봄날, 신선이 살고 있다는 광상산의 꿈을 꾼다. 꿈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생생했다. 꿈속에서 지은 시도 생생해 기록해 두었다. 마지막은 이러하다.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달빛 아래 찬 서리에 붉게 떨어졌구나.

동생 허균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누이는 기축년(1589년) 봄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시에서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졌다고 했는데, 실제 징험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죽음을 4년 전에 이미 예감했던 것이다. 그는 정말 신선이었던 걸까.

#규방에서 그 너머를 꿈꾼 그녀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난설헌’은 그녀의 호다. 서경덕의 문인이자 동인의 영수로 이름 높던 허엽의 딸로 태어났다. 외조부 김광철은 전라도 관찰사까지 역임했다. 남편 김성립은 안동 김씨 명문가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명문가문에 둘러싸여 생장했으니, 그녀의 삶은 유복했을 법하다.

하지만 시어머니에게 용납되지 못했고, 부부간 금슬도 그리 좋지 않았다. 게다가 슬하 1남 1녀 모두 어린 나이에 잃어, 후사조차 없이 죽어 갔다. 짧고 강렬한 삶, 그것은 ‘재인박명’(才人薄命)이란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실제로 그녀가 남긴 시편은 부자유한 시대를 살아간 한 여성이 감내하고 소망하던 정감으로 가득하다. 규방에 갇혀 지내야 했던 여인의 원망을 절절하게 그려내기도 하고, 천상에서 노닐고 싶은 욕망을 환상적으로 표출하기도 했다. 세속 사람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유선시’(遊仙詩)는 그녀의 특장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신선이란 남성의 오랜 로망이었는데, 여성 허난설헌은 감히 그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녀의 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대부 남성의 전유물인 한시를 가지고 시선(詩仙) 이백까지 넘볼 정도였다. 그녀는 ‘채련곡’(採蓮曲)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가을이라 긴 호수엔 푸른 옥 흐르는 듯

연꽃 깊숙한 곳에 작은 배를 매어 두고

물 건너의 임을 보고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 부끄러웠네.

연밥을 따던 젊은 여인이 마음에 두고 있던 사내를 보고 연밥을 던지며 속마음을 표현했다가 다른 사람 눈에 띄어 수줍어하는 장면이 절묘하다. 하지만 이백의 ‘채련곡’은 연꽃 사이에서 연밥을 따고 있는 아리따운 처녀를 훔쳐보며 희희덕거리던 사내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사대부 남성의 관음증이 농밀하게 넘쳐났다. 그에 반해 허난설헌은 여성을 애정 표현의 주체로 당당하게 내세운다. 남성의 한시를 활용해 남성적 관점을 여성의 관점으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당나라 시인 이익의 ‘강남곡’(江南曲)을 차용해 시도하고 있는 전복 또한 흥미롭다.

남들은 강남땅 좋다 하지만

내 보기엔 강남땅 시름겹기만.

해마다 모래톱 포구에 서서

애끊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배만 바라보네.

본래 이익은 돌아올 기약 없는 장사꾼보다 밀물·썰물처럼 들고 나는 것이 분명한 뱃사공에게 시집가는 게 좋을 뻔했다는 여인의 심경을 노래했다. 하지만 허난설헌의 ‘강남곡’은 다르다. 남자들은 놀기 좋은 곳으로 강남을 꼽지만, 여성에게 그곳은 기약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수심의 장소일 뿐이다. 탕자들이 실컷 놀다 가버리고 마는 강남이란 공간 자체의 성격을 전복해버린 것이다. 허난설헌은 그런 시각을 ‘남’(人)과 ‘나’(我)로 명확하게 구분 짓는다. 사대부 남성의 한시를 가지고 이렇듯 규방 너머에 그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갔다.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에 있는 안동 김씨(서운관정공파) 묘역에 있는 허난설헌 묘.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김성립 묘역 아래에 자리했다. 묘 옆에 시비를 세워 그녀가 뛰어난 시인이었음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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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에 있는 안동 김씨(서운관정공파) 묘역에 있는 허난설헌 묘.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김성립 묘역 아래에 자리했다. 묘 옆에 시비를 세워 그녀가 뛰어난 시인이었음을 기리고 있다.

#사대부 남성과 어깨를 겨루었던 그녀

하지만 사대부 남성이 구축해 온 사회적 규범과 문학적 전통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출중한 재주를 갖췄더라도 한 여성이 완벽하게 넘어서기에는 너무 강고했던 것이다. 실제로 난설헌시집을 읽다 보면, 당시(唐詩)를 배워 가던 습작의 흔적을 종종 만나게 된다. 때문에 숱한 표절 시비에 휘둘렸다. “두세 편을 제외하고 모두 위작이다”(이수광)거나 “남동생 허균이 중국시를 표절해 끼워 넣었다”(신흠)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랬던 이수광은 순천부사로 있으면서 ‘강남곡’을 지었다. 순천이 ‘소강남’으로 일컬어져 왔던 까닭이다.

남들은 강남을 낙원이라 하지만

나는야 강남을 악지라 말한다오.

첩첩 파도는 산보다 높게 일어나고

사나운 바람 사시사철 몰아친다오.

모두 순천을 낙원으로 일컫고 있지만 직접 보니 그렇지 않다는 반전은 허난설헌의 그것과 흡사하다. 허난설헌의 ‘강남곡’에서 얻은 착상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격조는 한참 떨어진다. 허난설헌의 작품을 표절이라고 비난한 신흠도 마찬가지였다. “규수 허씨의 ‘사시사’가 세상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허난설헌의 ‘사시사’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비난하지만 비난되지 않던 허난설헌의 시적 성취를 보여 주는 사례다.

몸은 비록 밀폐된 규방에 갇혀 있었을지 몰라도 그녀의 시 정신은 그를 훌쩍 뛰어넘어 천상과 같은 상상의 공간만이 아니라 사대부 남성의 현실 공간까지 휘젓고 다녔던 방증이다.

정출헌 한국고전번역원 밀양분원장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2018-09-1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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