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나의 여름/황수정 논설위원

입력 : ㅣ 수정 : 2018-09-0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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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남도 여행길에 이름으로만 알던 산수국을 처음 만났다. 한갓지게 팻말을 앞세운 산수국 무리를 한참 앉아 뜯어봤다. 한치 흐트러짐 없는 꽃잎 차례. 이름조차 산(山)인 꽃이 그렇게 요염하다니.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었다.

공원길에도 모르는 늦꽃이 만발했다. 분홍색 한지를 둘둘 말아 놓은 모양의 연꽃도 무궁화도 아닌 그 이름은 부용화(芙蓉花).

걸음이 달팽이처럼 느려진 아버지와 부용화 처음 본 공원길을 느리게 느리게 걷는 저녁. 잊어버린 옛일을 꺼내듯 아주 오랜만에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껑충한 부용 꽃밭을 비집고 들어가 뻘쭘하게 둘이서 얼굴을 내밀고. 석양의 사진 속에서 우리 아버지 얼굴이 된 꽃. 백과사전이 뭐라고 하든 내게는 아버지(父) 얼굴(容) 꽃!

어느 곰살맞은 작가는 책을 읽을 때 자신의 나이와 같은 페이지에 도장을 찍어 둔다고 했다. 삶의 모퉁이 모퉁이를 어떻게 돌아 나왔는지 기억하려는 방편이다. 쏜살같은 시간 속에 붉은 도장밥을 느리게 꾹꾹 새길수록 이기는 삶이 아닐는지. 낯선 것들을 오래 보기, 익숙한 것들을 다시 보기.

산수국, 부용화 몇 떨기에 우물이 고여 좀처럼 떠나지 않는 나의 여름.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2018-09-05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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