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2

입력 : ㅣ 수정 : 2018-09-16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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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발굴 조선 첩보소설 ‘황제 납치 프로젝트’ 2회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2회>

소설 ‘고종과 미인계’가 실린 미국 포퓰러 매거진 1912년 12월 하반호 표지.

▲ 소설 ‘고종과 미인계’가 실린 미국 포퓰러 매거진 1912년 12월 하반호 표지.

이제 소녀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905년 10월 어느날이었다. 서울 남대문 외곽 애스터하우스 호텔(현 서대문역 농협중앙회 터) 로비로 처음보는 백인 여성 하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더니 웨이터 박군을 불러 뭔가를 부탁했다. 그때 나와 베델은 그녀 건너편에 있던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베델은 한창 하세가와(조산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갑자기 숨이 막힌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번역자주:베델은 실레로 애스터하우스 호텔을 수시로 이용했습니다. 베델을 24시간 감시했던 일본의 기록에도 이런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소설에는 이런 배경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잠깐만!...헉...” 그는 갑자기 말을 끊더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몸매는 버드나무처럼 갸냘펐다.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마 위로 짙은 갈색 머리를 땋아 올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부드러움이나 자연스러움 같은 건 없었다. 눈이 매우 불규칙하고 입도 큰 편이었다. 하지만 뭐랄까...다른 여자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이 묻어났다. 남자를 지배할 듯한 자립심과 통제력이 얼굴에 담겨 더욱 생기있고 매력있게 느껴졌다.

우리는 그녀가 누구이고 또 서울에서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궁금했다. 선교사나 외교관 부인들을 빼면 서울에서 백인 여성을 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바에서 술을 마시던 호텔 주인 루이(실제 이 시기 애스터하우스 호텔을 운영한 프랑스인 L. Martin으로 추정)를 불러내 그녀에 대해 아는 걸 모두 털어놓으라고 채근했다. 루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프랑스식 영어로 답했다.

“음...그녀는 여기에 혼자 왔어요. 큰 트렁크 하나에 작은 여행용 가방 하나만 가지고서...음...라벨에 뭐라고 써 있더라...상하이 애스터하우스 호텔, 요코하마 오리엔탈 팰리스 호텔...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메일’ 신문도 있었던 것 같고...”

그때 웨이터 박군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베델의 팔을 툭 치며 어눌한 영어로 말을 건넸다.

“새로 온 여자분이...보자고....한다...선생님...보고 싶다....전해달래요.”
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서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의 모습. 현재 이곳에는 서대문역 농협중앙회가 자리잡고 있다. 1905년 당시 서울의 중심호텔은 손탁호텔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손탁호텔에서 대한제국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 이뤄졌다. 그럼에도 작가가 손탁호텔이 아닌 애스터하우스 호텔을 배경으로 택한 것은 이 소설이 당시 비주류였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한다는 취지를 살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진석 교수 제공

▲ 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서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의 모습. 현재 이곳에는 서대문역 농협중앙회가 자리잡고 있다. 1905년 당시 서울의 중심호텔은 손탁호텔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손탁호텔에서 대한제국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 이뤄졌다. 그럼에도 작가가 손탁호텔이 아닌 애스터하우스 호텔을 배경으로 택한 것은 이 소설이 당시 비주류였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한다는 취지를 살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진석 교수 제공

베델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환하게 피어 올랐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조금 의아하다는 느낌도 베어났다. 베델은 박군과 함께 바를 떠나 한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와 루이는 오늘 처음 본 그 신비로운 여성이 누구인지, 또 서울에는 왜 왔는지 온통 궁금했다. 우리는 아르헨티나산 ‘페르넷 브랑카’(이탈리아에서 개발된 유명술로 알콜 도수가 35도 이상임)를 마시며 내내 떠들어댔다.

마침내 베델이 문을 열고 다시 나타났다. 그는 나보고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프랑스인 특유의 기분 좋은 취기를 풍기던 루이를 남겨두고 나는 베델을 따라갔다.

“빌리, 중요한 일이야” 베델이 문을 닫으며 속삭였다. “정말 중요한 일이야. 네 도움이 필요해.”

베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뛰어올라 2층으로 갔다. 거기에는 ‘숙녀용 응접실’이 하나 있었다. 앞서 베델과 나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소녀’(the girl)라고 부르기로 했다. 소녀는 우리가 들어가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보라색 눈에서 자신감이 흘러 나왔다. 활짝 웃는 입가에 강한 힘을 묻어났다.

베델이 우리를 차례로 인사시켰다. “그럼 저에게 하신 얘기를 빌리에게도 들려주시면 좋겠군요. 당신과 같은 미국인이고, 더군다나 아주 용감합니다. 그래서 이 친구를 친형제처럼 신뢰하죠. 하하하.”

베델이 날 이 정도로 아꼈나...아무튼 갑자기 너그러워진 영국인 용사는 소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는지 나를 과장해 칭찬했다. 소녀는 재빨리 방 전체를 둘러본 뒤 복도를 살피고는 문을 걸어 잠궜다. 매우 낡고 흔들거리는 램프 아래 세 명이 둘러 앉았다. 소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과거 여러 남성들을 휘하에 뒀고 지금도 그런 위치에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러시아 극동총독으로 당시 동북아 정책에 깊히 개입했던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1843~1917). 위키피디아 제공

▲ 러시아 극동총독으로 당시 동북아 정책에 깊히 개입했던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1843~1917). 위키피디아 제공

“저는 지금 상하이에 있는 어떤 높은 분을 대신해서 서울에 왔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소녀는 허리띠에서 작은 금색 연필을 꺼낸 뒤 수첩에서 종이 한 페이지를 떼어내 뭔가를 적었다. 나는 당장 그분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려고 한다. 다만 그는 러시아가 극동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을 미리 제거하는 데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동북아 정세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큰손’(러시아 극동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 추정) 정도로 알고 있으면 될 것 같다. 내가 종이에 씌여진 이름을 확인하자 소녀는 이를 잘게 찢어 조각낸 뒤 자신의 지갑 속에 집어넣었다.

3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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