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유골… 낙동강 전투 참혹함 잊지 못해”

입력 : ㅣ 수정 : 2018-08-29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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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14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1951년 3월 28일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통신교육 수료 기념사진을 찍은 통신병들. 이들은 인천지역 중학교 1~3학년에 재학 중인 중학생들로 인천에서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통신병으로 700여명이 자원입대하여 이중 약 35명이 전사했다. 6·25에 참전한 인천학생은 모두 2000여명으로 밝혀졌으며 최종적으로 확인된 인천학생 출신 전사자는 208명이다. 흰색 원안이 정대연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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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3월 28일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통신교육 수료 기념사진을 찍은 통신병들.
이들은 인천지역 중학교 1~3학년에 재학 중인 중학생들로 인천에서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통신병으로 700여명이 자원입대하여 이중 약 35명이 전사했다.
6·25에 참전한 인천학생은 모두 2000여명으로 밝혀졌으며 최종적으로 확인된 인천학생 출신 전사자는 208명이다.
흰색 원안이 정대연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

정대연 인터뷰

일시 1997년 8월 4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 치과 3층)

대담 정대연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 실종된 인천 학생들

나(정대연)는 인천 화도진 고개 넘어 화수동 111번지 쌍 우물 앞 배급소 집 외아들로 태어나 창영국교를 졸업하고, 인천동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서대문에 있는 감리교 신학대학교 2학년 때 6·25 사변이 터졌다. 인천을 점령한 북한괴뢰군들은 인천 지역에서 중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인민의용군에 입대시켰는데, 강제로 끌려간 중학생들은 그 후 모두 실종이 되었다.

9·15 인천수복과 인천학도의용대의 창설

UN군의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수복이 되어서, 고려대 2학년생 이계송을 대장으로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를 조직하여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 호국(護國)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나는 인천학도의용대의 부연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50년 늦은 가을 중공군의 참전으로 우리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게 되어, 또다시 인천이 적화(赤化)가 되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실종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우리들은 걱정만 하고 있었다.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남하

1950년 12월 초 국방부 정훈국 인천파견대에서는 인천 지역의 중학생들도 남쪽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12월 18일 제일은행 인천지점 건너편에 있었던 경기도 병사구 사령부(현재 병무청) 소속 국민방위군 소위가 선두에서 인천학도의용대 3000명 대원을 이끌고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수용소(통영충렬국교)를 향하여 우리들은 걸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 24일 대전역 도착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처음 1박을 한 곳은 안양이었다.

우리들은 1950년 12월 20일 수원에 도착하여 수원역에 안내판을 만들어 성탄절 날까지 대전으로 오라고 알렸다.

1950년 12월 24일 인천학도의용대 본대는 대전에 도착하여 성탄절을 대전역에서 맞았다.

1950년 12월 29일 마산 도착

대구를 지나서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을 거치면서 우리들은 논밭에 버려진 수많은 얼거나 굶어 죽은 국민방위군 시체를 보면서 그 머나먼 남쪽 끝까지 모진 고생을 하면서 내려온 우리들은 부패한 국민방위군의 제3수용소(통영충열국교)에 어린 대원들을 입소시킬 수 없어서 마산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통영으로 남하하는 것을 정지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참모회의를 신마산역 중앙여관에서 하여, 대구 육군본부를 찾아가서 담판 짓기로 하였다.
1953년 3월 7일 대구 육군 제1병원 정문에서의 정대연. 사진 찍은 후 이틀 뒤에 의병 제대했다.

▲ 1953년 3월 7일 대구 육군 제1병원 정문에서의 정대연. 사진 찍은 후 이틀 뒤에 의병 제대했다.

대구 육군본부에서 황헌친 인사국장 만남

이계송 대장과 나는 걸어서 대구를 가게 되었다. 낙동강에 도착했을 때는 생전에 잊지 못할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강변에 많은 유골이 널려있는 것이 낙동강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 주는 끔찍한 장면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계송 대장과 나는 육군본부 인사국장 황헌친(黃憲親) 준장을 만나서 우리가 육군본부에 찾아오게 된 동기를 인사국장에게 설명하고 인천학도의용대의 진로에 대한 각서를 받았다.

황헌친 준장이 만들어준 각서 내용

①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의 이동함에 있어 차량이나 선박을 이용할 수 있는 차량·선박 징발권(徵發權)을 준다.

②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은 부산 육군 제2훈련소에 1951년 1월 10일까지 입소하고, 포병사관학교에 응시할 기회를 준다.
1951년 10월 5일 강원도 향로봉전투에서의 정대연(가운데).

▲ 1951년 10월 5일 강원도 향로봉전투에서의 정대연(가운데).

中 4~6학년생들이 먼저 해병으로 자원입대

이계송 대장과 나는 다시 걸어서 낙동강을 건너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이 수용돼 있는 마산 임시 거처에 와서 보니까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마산에서 가까운 진해 해병교육대 신병으로 중학교 4~6학년생들 600여명이 자원입대했고, 인천에서 같이 출발한 국민방위군 소위가 나머지 중학교 1~3학년 대원들을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경남 통영출열국교)로 데리고 갔다.

中 1~3학년생들 부산 육군 제2훈련소 입소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에 수용돼 있는 우리 대원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이 계송 연대장과 나는 마산에서 출발하여 통영을 향하여 배를 타고 가서, 통영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인 충렬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우리 대원들이 마산에서 통영으로 가게 된 경위는 인천에서부터 우리와 같이 행동했던 국민방위군 인솔 소위가 자기가 받은 명령대로 2000명이 넘는 대원들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에 입소시킨 것이었다.

육군본부에서 받은 징발증(徵發證)을 수용소 소장에게 보여주고, 우리들은 모두 배에 나누어 타고 통영에서 출발하여 부산으로 향하였다.

1951년 1월 10일 인천학도의용대원 1500여명은 육군 제2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입소하였으며 훈련병이 된 이 날부터 인천학도의용대의 조직은 사라지게 되었다.

1951년 2월 1일 육군통신학교 입교

부산육군 제2훈련소를 마치고 부산육군통신학교로 간 날이 1951년 2월 1일이다.

우리가 지휘관 옆에서 조금 안전하게 근무하는 통신병이 된 데에는 인천상업중학교 물리 교사 출신의 부산육군통신학교 신봉순 교육대장님 덕분이었다. 신봉순 교육대장님은 1951년 2월 1일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중 500명을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입교시켰으며, 오갈 데 없었던 여학생 120명의 숙식을 해결해 주고, 다시 인천으로 여학생들이 돌아가는 것을 도와주신 인천학도의용대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반드시 살아서 고향에서 꼭 다시 만나자”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통신교육을 마친 나는 인천에서부터 부산까지 같이 걸어와서 함께 자원입대한 고향 후배들에게 반드시 살아서 인천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하며 울면서 헤어졌다.

처음에는 육군 제8사단으로 배치받았다. 다음에 나는 육군본부 내의 통신부분을 담당하는 561부대로 가게 되었다.

그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서, 1953년 3월 9일 군에서 명예제대하였다.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진 학창시절’

1997년 6월 25일 자 인천일보에서 6·25 특집(特輯) ‘전쟁터 이슬로 사라진 학창시절’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내 가슴에 와닿는 것은 나하고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했던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이경종(인천상업중학교 3학년때 자원입대)의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이 우리 인천학도의용대의 6·25 참전역사 찾기를 시작했다는 기사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또한 나의 기억을 글로 남기게 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이경종규원 2부자(父子)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편찬 사업이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 참전기 14회를 마치며

23살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정대연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님은 육군 중위로 장교 현지임관 제의도 거절하고, 중학생 동생들과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였습니다.

많은 인천의 중학생들을 위기에서 구했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섭섭해하지 않았던 인천의 훌륭한 형입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1997년 8월 4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녹음을 마친 정대연(왼쪽)과 이규원 치과 원장.

▲ 1997년 8월 4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녹음을 마친 정대연(왼쪽)과 이규원 치과 원장.

■ 정 대 연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

1951년 10월 5일 강원도 향로봉전투에서의 정대연(가운데).

1928년 9월 3일 인천 화수동 출생

1949년 2월 15일 인천동산중학교 졸업

1950년 6월 25일 서울감리신학대학 2학년

1950년 9월 25일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으로 추대

1951년 1월 10일 통신병으로 입대(군번 0246202)

1953년 3월 9일 의병 제대
2018-08-30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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