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자의 신화로 문화읽기] ‘긴 여름의 끝’에 신화를 말하다

입력 : ㅣ 수정 : 2018-08-2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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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무시무시한 여름이었다. 히로시마 일대에 기록적 폭우가 내린 날에는 일본에 있었고, 40도에 육박하는 열기가 휩쓴 7월에는 서울에 있었다. 8월 초에는 중국 답사를 예정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폭우로 길이 끊겼다는 소식이 들려와 일정을 변경해야 했다. 그렇게 기후변화가 심상치 않음을 우리 모두가 몸으로 느낀 여름이었다.
김선자 연세대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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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자 연세대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이제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여름도 끝자락을 보이는 듯한데, 문제는 이것이 ‘긴 여름의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뜨거운 여름은 이제 시작이다. 북극 ‘최후의 빙하’가 녹아내렸다는 사실은 기상학자들까지 충격에 빠뜨렸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이 이미 깨졌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동아시아 소수민족들의 신화는 일찍부터 그 문제에 대해 말해 왔다. 소수민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대부분 환경이 열악하다.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고원이나 메마른 초원, 혹은 사막 지역 사람들에게 ‘물’은 생존의 기본 요건이다. 초원을 적시는 물 한 줄기가 없다면 그곳은 금방 사막이 돼 버리고,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고원지대에서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 낸 냇물 한 줄기가 사라진다면 그들 민족은 생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초원과 사막, 고원의 물 한 줄기를 지키고자 많은 신화를 만들어 냈다.

중국의 서남부 윈난성 리장(麗江)의 나시족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사는 마을 뒤에는 5000m가 넘는 설산이 있다. 그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나시족 사람들이 마시는 수원지를 형성했고, 사람들은 그 물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신화를 보면 처음에 인간은 자연의 영역을 끊임없이 침범했다. 뱀 모양의 하반신을 한 자연신 ‘수’는 숲과 물에 깃든 신이다. 수는 인간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나무를 베어내어 경작지를 만들었으며, 함부로 동물을 사냥했고, 그 내장을 시냇물에 버려 물을 오염시켰다. 수는 더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홍수를 내려 인간이 일군 경작지를 망가뜨려 버렸다. 인간도 분노했다. 자신들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힘들여 일군 경작지를 자연신이 망쳐 버리니 화가 난 것이다. 그래서 자연신 수와 인간은 나시족의 최고신을 찾아가 각각 상대방을 비난하며 징벌을 내려 달라고 요구했다.

고민에 빠진 천신은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마침내 판결을 내렸다. 인간이 이미 이렇게 많아졌으니 없애 버릴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인간에게 열 개 중 아홉 개의 영역을 주겠다고 했다. 불공평한 판결이라고 자연신이 분노할 만했으나, 수는 신의 판결에 동의했다. 한 개 남은 자연신의 영역에 인간이 침범한다면, 수가 인간에게 그 어떠한 징벌을 내려도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자연신은 살짝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신의 판결을 존중하기로 했다. 인간 역시 이미 아홉 개의 영역을 확보한 터였다. 하나 남은 영역쯤이야 그냥 자연신에게 남겨 주기로 했다.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리장 고성(古城)이 그렇게 맑은 물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인간과 자연이 맺은 계약 관계를 지금까지 잘 지켜 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2018년 현재 리장 고성의 흑룡담 공원에서 바라보는 위룽설산의 모습은 20여년 전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다르다. 만년설로 뒤덮였던 설산은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눈(雪)을 잃어 가고 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수의 공간을 인간이 다시 침범할 때,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은 깨지고 수의 공격이 시작될 것임을 그들의 신화는 예견하고 있다.

긴 여름의 끝에 나시족의 신화를 다시 떠올리는 이유다.
2018-08-2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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