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입력 : ㅣ 수정 : 2018-07-27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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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중략)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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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신의 핵심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사랑이다. 핍진한 삶과 세상을 따뜻하고 우아하게 끌어안기. 세상에 이보다 힘든 화두는 없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화두에 몰입할 수 있다면 삶은 그 자체로 부드러워질 것이다. 이원하의 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는 자신이 살아 숨 쉬는 일상의 세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수국 빛깔의 언어로 보여 준다. 제주를 찾아오는 여행자를 보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쏟아진다는 진술은 세계에 대한 연민이자 사랑이다. 즉물적인 물그릇이 아닌 내면의 물그릇이 쏟아짐을 진술한다. 시인은 소주 두세 병에 약간의 취기가 돌 정도라고 인터뷰에 적었다.

곽재구 시인
2018-07-2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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