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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플러스] 美 카네기홀에 ‘황해도 굿’ 선보인다… 한민족 신명 춤사위 ‘덩실’

[인터뷰 플러스] 美 카네기홀에 ‘황해도 굿’ 선보인다… 한민족 신명 춤사위 ‘덩실’

입력 2018-07-18 16:54
업데이트 2018-07-1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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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바기 선원·무당금파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우리 민속 ‘황해도 굿’이 오를 전망이다. 강신무로 황해도 굿을 전승한 운바기 선원 무당금파(본명 이효남·51·사무실 서울 서초구 우면동)의 공연예술 황해도 굿이다. 그의 카네기홀 공연은 우리 민속 굿이 공연예술의 한 장르로서, 또 한국인 무당으로서는 처음이다.

무당금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달 미국 뉴욕에서 카네기홀 공연기획자와 만나 내년 초 공연을 열기로 했다”며 “구체적인 세부 일정을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카네기홀 공연이 결정되는 과정과 시기를 보니 ‘이게 내 뜻이 아니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며 “세계가 한반도를 주목하는 시대에 한민족 평화의 봉화를 높이 드는 것 같다”고 전제한 다음 “하늘이 나에게 무거운 짐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무당금파에 따르면 그의 이번 카네기홀 공연프로젝트는 ‘한민족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2015년 11월 1일 ‘치우천황 넋을 기리며’란 주제로 열린 ‘나라 통일굿’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한민족의 역사문화의 한 축을 담당해 온 ‘무속인과 민속굿’은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몇몇 위정자들에 의해 폄훼되고, 심지어 말살되는 아픔이 있다. 특히 한민족의 걸출한 영웅인 배달 한국의 14대 환웅 치우천황이 탁록에서 황제헌원에게 패함으로써 그 몸이 100각으로 잘려 흩뿌려진 원한으로 상징된다. 하지만 그 원형은 황해도 굿에 담겨져 전승돼 온 만큼 카네기홀 공연은 한민족의 한풀이인 동시에 세계로 웅비하는 신명 춤이란 해석이다. 특히, 최근 국제정세가 동북아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로의 이행에 집중되는 시점과 맥을 같이하면서 ‘카네기홀 황해도 굿 공연’이 갖는 상징성도 커졌다는 분석이다. 한반도 평화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축하공연’이란 성격에다 한민족의 한풀이 내지는 살풀이에 비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무당금파는 “한반도의 대전환으로 세계가 평화로 나가는 변곡점을 지나는 만큼 한민족의 살아있는 정신이자 혼을 담은 ‘예술로서의 굿’으로 세계와 소통할 새로운 굿을 창작할 때가 왔다”면서 “황해도 굿에 뿌리를 둔 새로운 공연 굿으로서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아리랑 굿’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다짐했다.

한편, 무당금파는 1999년 수원 팔달산에서 무불통신 후 신내림굿으로 무속인이 된 다음 6년에 걸쳐 황해도 굿의 세 장르인 도시굿·산굿·배굿을 대표하는 세분의 선생으로부터 6년에 걸쳐 전수받아 이를 종합한 ‘새로운 황해도 굿’을 선보여 왔다. 셋이 모여 독창적인 ‘금파무당만의 황해도 굿’으로 재해석·재창조 됐다는 의미다. 나아가 카네기홀 공연을 계기로 ‘금파의 황해도 굿’이 세계의 아리랑 굿으로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무당금파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간 운바기 선원 창밖으로 비친 정원을 가리키며 “학이야, 두리미야, 뭐야, 아침부터 저기에 날아와 지금껏 노닐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에 고개 돌려 보니 백로였다. 백로는 우아하고 고귀한 자태로 청결·강직하고 주체성이 강해 신선이 탄다는 학(鶴)과 함께 평화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임하여 민족의 염원대로 평화로운 대한민국, 번영하는 한반도가 속히 오길 기대해 본다. 무당금파와 인터뷰는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자리한 운바기 선원에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편집자 주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내년 초순경에 ‘황해도 굿’을 무대에 올리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예상 밖으로 신선한 도전입니다.

-3~4년 전부터 샌프란시스코 시티홀 공연을 준비해 왔습니다. 하지만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한인사회의 주류이다 보니 용납이 안 됐습니다. 우리 민속의 전통을 간직하며 전승돼 온 전통예술로 이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외국 사람들의 경우 우리나라 굿을 보면 같이 뛰고, 같이 춤추면서 되레 ‘반한다’고 할까요. 한마디로 미쳐요.

제가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고, 황해도 굿을 하면서 ‘이것은 예술이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1999년 무당이 된 후 2001년 경기도 이천 도자기 축제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 후 2015년에는 광화문에서 ‘치우천황을 기리며’란 주제로 기우제 성격의 공연예술로 하늘굿을 했습니다. 당시의 공연은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알자’는 취지였죠.
미국 카네기홀 앞에 선 무당금파.
미국 카네기홀 앞에 선 무당금파.
그러다 지난달 미국 뉴욕을 업무차 방문하게 됐는데요. 카네기홀 공연기획자를 우연히 만나게 됐고, 그 자리에서 내년 초순경에 황해도 굿을 카네기홀에 올리기로 합의했습니다. 우리 민속의 예술성을 해외 무대에 올려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로 시작했는데요. 합의되는 순간 몇 년 전부터 준비는 제가 해 왔지만 ‘이것은 내 뜻이 아니구나. 하늘이 나에게 무거운 짐을 주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가 한반도를 주시하고 있고, 한반도가 세계 평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현시점에서 ‘카네기홀의 황해도 굿’은 그 자체로 상징성이 크잖습니까. 하늘의 뜻이라고 저는 봅니다.

→황해도 굿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진 겁니까.

-물론 강신무로 신내림을 받을 때 황해도 굿과 첫 인연을 맺었습니다. 황해도 굿은 크게 개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굿, 산신을 모시는 산굿, 서해안의 용궁을 모시는 섬굿이라고도 하는 배굿 등 세 가지로 나뉩니다. 저는 이 세 굿을 당시를 대표하는 세분의 선생들로부터 6년에 걸쳐 배웠습니다. 세분 선생을 모시고 같이 굿을 하다 보니 손짓, 발짓, 몸짓에서 뿜어내는 추임새에서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엮어진 거죠. 어느 순간에 배워진 거죠. 삼법귀일이라고 할까요. 셋이 모여 무당금파만의 황해도 굿으로 승화됐습니다. 특히 연극을 전공한 덕분으로 무대예술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을 생각해 줘야 했고, 손·발·몸짓의 동작과 추임새 하나하나를 관객들의 시선에 맞추다 보니 ‘무당금파 스타일’로 황해도 굿이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그래서 전통 굿을 전승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통은 아닌 거죠. 저는 그래서 ‘짬뽕이다’고 말합니다.

→앞서 ‘한민족 바로 알기’로 ‘치우천황을 기리며’란 주제로 공연을 하셨다고 했잖습니까. 어떤 연유인가요.

-저는 치우천황을 모신 무당입니다. 제게 신으로 오실 때 ‘시커먼 양반이 도깨비다’하시면서 오셨죠. ‘도깨비라니, 무슨 신이지?’ 하면서 한민족의 역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마고 할매와 한인·한웅·단군이 엮이고 단군만 해도 한 분이 아니라 마흔일곱 분이 계신 거예요. 사실 저는 단군이 한 분인 줄 알았거든요. 그때 혼란이 왔죠. 또 도깨비란 배달 한국의 14대 환웅이신 치우천황을 말하는 거고, 또 전쟁 신으로서 전쟁을 하면서 청동 가면을 쓰신 연유로 도깨비로 불리게 됐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탁록 전투에서 황제헌원에게 패함으로써 그 몸이 100각으로 잘려서 천지사방으로 흩뿌려졌다는 것도 알게 됐죠. 분명히 우리 조상이고, 역사인데도 학교에서 국사 시간에 전혀 배우지 못한 사실들을 알게 된 거죠. 한 예로 황해도 굿에 ‘군웅푸리’가 있습니다. 돼지를 육각, 팔각으로 뜨는 행위가 치우천황의 한풀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을 갖게 됐죠. 그렇다면 돼지는 황제헌원이겠죠. 그래서 2015년 11월 1일 ‘나라 통일굿’으로 기우제 성격의 하늘굿을 공연했습니다. 민족혼이 스며 있는 민족굿의 공연예술을 통해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알자는 취지였던 것, 맞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에서 말하는 황해도 굿과 ‘공연예술로서의 굿’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요.

-굿은 보통 재가집이라고 의뢰자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굿을 하게 되면 보통 2박 3일을 합니다. 굿에는 거리라고 해서 여러 거리가 있는데요. 연극으로 하면 장막에 비유할 수 있겠죠. 그래서 그 순서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지켜야 합니다. 재가집에 초점을 맞춰 재가집의 발복, 복을 빌어줘야 하는 거죠.

반면 공연예술로서의 굿은 관객입니다. 신을 모시되 2박 3일 분량을 1~2시간 분량으로 압축해 예술성을 보여줘야 합니다. 신을 모시되 퍼포먼스를 극대화시켜야 하는 만큼 위험성도 더 커집니다. 가장 큰 위험은 작두타기죠.

→현판이 ‘운바기 선원’이던데요. 유튜브를 보면 ‘운바기 기도법’이 나옵니다. 어떤 기도법인가요.

-운바기는 ‘운명을 바꾸는 기도법’의 준말로서 한마디로 ‘나만의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까지 각자의 종교가 내려왔는데, 그게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만들자는 취지로 시작했습니다. 사람에게는 각자 내 안의 생명, 양심이 있잖습니까. 많은 성현이 ‘하나님, 한울님’으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내 안의 생명은 나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밖에서 찾지 말고 내 안의 생명을 찾으면 그 생명이 빛을 발하게 되고, 그러면 유전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암도 고치고, 알코올 중독자도 고침을 받습니다. 내 안의 생명이 깨어나 빛을 발한 결과인 거죠. 그러니까, 기도란 어떤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고를 풀어내는 겁니다. 내 안의 하나님, 부처님을 찾는 것이 기도인 거죠. 저는 이를 ‘운바기’라고 이름 붙인 거죠.

그런데 말이죠. 운바기를 하다 보면 억울하게 돌아가신 조상들이 나옵니다. 자살과 타살로 가신 분, 청춘에 가신 분, 세월호처럼 억울하게 간 혼령들이 나옵니다. 자기네가 억울하게 가신 조상들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기도만으로 풀어서 해원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때 굿으로 그분들의 한을 풀어드리는 겁니다. 무당금파가 굿을 많이 하는 이유죠. 그래서 운바기는 자신의 업과 조상의 업을 풀어내는 신법, 불법, 도법으로 나뉘는데요. 죽어서 극락 가고, 천당 가자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죽자는 거죠. 그러자면 스스로 유전병을 고치고, 미리 병을 발견해서 치유하자는 겁니다. 그래야 원귀가 안 되고, 후손들이 편하다는 거죠.

→그럼, 무당은 어떻게 되셨고, 앞으로 비전은 무엇인가요.

-1999년도에 수원 팔달산에 소주 들고 인사 갔다가 새벽 4시경에 무불통신으로 신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때 돈이 없어 종살이 5년 하기로 하고 ‘신내림굿’을 했는데, 그 신굿이 6시간 만에 끝났습니다. 50만원 월셋집에 15만원을 내지 못해 비 오는 장마에 짐을 마당에 비닐로 씌우고 나온 경우도 있습니다. 9년을 그렇게 전전긍긍으로 살다가 2008년 태백산 약수암으로 갔습니다. 잠잘 집과 먹을 것이 없어 어쩔 수가 없었죠. 그렇게 3년, 1060일을 꼼짝 못 하고 갇힌 신세가 되어 기도로 세월을 보냈죠. 3년 기도를 마칠 즈음 ‘운바기 기도법’을 터득했고, 2011년 하산했습니다. 운바기 기도가 점차 알려지며 2015년 말부터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꽃이 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한풀이란 우리 민속의 굿을 세계 속에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무당이 되어 나의 한도 풀어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민족의 한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계 속에서 치우천황의 한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은 황해도 굿으로 카네기홀에 가지만, 다음에 갈 때는 ‘아리랑 굿’으로 승화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에는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모 방송에 얻어맞을 때는 화도 나고, 위축도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 치우천황의 탁록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지금은 아닙니다. 황해도 굿은 단군을 뿌리로 한 전통입니다. 원형을 지켜가겠지만 중간 중간에 음악 등 창작을 결합해서 계속 발전시켜 젊은 세대로 대중화해 나갈 겁니다. 아리랑 굿으로 승화시켜 세계 속에 한민족의 혼을 드높일 겁니다. 응원을 부탁합니다.

서원호 객원기자 guil@seoul.co.kr

2018-07-19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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