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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친구 강기주·김우종·김덕용이 위령제 전사자 명단에 있었다”

“고향 친구 강기주·김우종·김덕용이 위령제 전사자 명단에 있었다”

입력 2018-06-28 17:04
업데이트 2018-06-28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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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1955년 12월 17일 많은 유가족이 통곡하는 가운데 인천 중구 신흥동 소재의 해광사에서 열린 ‘제1회 전몰학도 위령제’. 인천에서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하고 참전한 인천의 중학생은 약 2000명인데 이중에서 최종적으로 확인된 전사자는 208명이다.
1955년 12월 17일 많은 유가족이 통곡하는 가운데 인천 중구 신흥동 소재의 해광사에서 열린 ‘제1회 전몰학도 위령제’.
인천에서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하고 참전한 인천의 중학생은 약 2000명인데 이중에서 최종적으로 확인된 전사자는 208명이다.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2회
●장순산 인터뷰

일시 1997년 12월 3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 치과 1층)

대담 장순산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중학교 2학년 때 일어난 6·25 사변

6·25 사변은 내(장순산)가 영종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일 때 일어났다. 전쟁이 터지면서 내가 사는 인천 중구 영종도에도 북한 괴뢰군(傀儡軍)이 들어와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제일 고통스러웠던 일은 어린 학생들까지도 북한 인민의용군(義勇軍)으로 잡아가는 일이었다.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간 많은 학생은 결국 실종되었다.

나도 인민 의용군으로 잡혀가지 않으려고 숨어 지내다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우리 영종도도 밝은 세상을 맞게 되었다.

인천학도의용대 영종지대 창설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수복이 되면서 인천에서 학도의용대가 창설되면서 각 지대가 생기게 되어, 영종지대도 조직되었다.

영종지대장은 건국대학생인 장치복이었다.

적화(赤化) 후에 영종도 지역도 공산 괴뢰군들의 탄압으로 많은 섬 주민들이 고통을 당해 수복되었을 때는 많은 학생이 학도의용대에 가입해 빨갱이와 부역자들을 색출하는데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 영종지대에는 여학생 대원들도 많았다. 그들은 주로 인천학도의용대가(仁川學徒義勇隊歌)를 보급시켜 주기도 하고 홍보도 하면서, 잔일을 도맡아 하기도 하였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1950년 12월 초 전황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우리 국군과 UN군이 매일 후퇴 중이었다.
지리산 야영지에서 국군 제5사단 27연대 3대대 대대본부
지리산 야영지에서 국군 제5사단 27연대 3대대 대대본부 1952년 3월 8일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중 인천 지역의 중학생 출신 통신병들과 찍은 사진. 하얀색 원 안이 장순산 중사.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따라 남하

드디어 1950년 12월 18일 새벽에 영종나루터에 나가 우리 영종지대 대원들은 배를 타고 인천으로 건너갔다. 그때 내 마음은 우리들이 일단 후퇴했다가 인천이 다시 수복되면 고향에 돌아오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그날 인천 병사구 사령부(현 병무청)에서 나온 국민방위군 소위를 따라서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를 향하여 걸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양에서 1박을 하고, 수원까지 걸어서 갔다. 수원에서는 기차 화물차를 타고 대구까지 갔으며 대구에서 모여 있다가 대구를 출발하여 청도, 밀양을 지나 마산으로 해서 통영까지 갔다.

1951년 1월 4일 경상남도 통영에 도착

인천에서 출발한 지 18일 만에 경상남도 통영에 도착한 우리들은 곧바로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로 입소하였다.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에서 수용소 생활을 한 지 며칠 지나서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우리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수용소에서는 우리들 전원을 학교 운동장에 집합하라 하더니 단체 기합을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들이 한참 단체 기합을 받고 있을 때 어디를 갔다 왔는지 인천학도의용대 이계송 대장이 갑자기 나타나서 통영 국민방위군 수용소 책임자한테 “지금 여기 있는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은 인천에서부터 이곳 통영까지 걸어와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군에 입대할 예정인데, 기합이 웬 말이냐 오늘 통영을 떠나 부산으로 갈 것이니 빨리 아침 식사를 시키시오”라고 말하여 기합을 중지시켰다.

우리들은 그날 아침을 먹고, 통영에서 배를 타고 마산을 들러서 부산에 도착하였다.

1950년 1월 10일 부산에서 자원입대

인천학도의용대의 많은 중학생이 부산 동대신동에 있었던 육군통신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당시 부산육군통신학교의 유선교육대장은 인천상업중학교 교사 출신 신봉순 대위님으로 아마도 지휘관 옆에서 군 복무하게 되는 통신병이 어린 중학생들에게는 좀 더 나은 군 복무가 될 거로 예상하시고 우리들을 통신병으로 이끌었다고 나중에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인천상업중학교 교사 출신 신봉순 유선교육대장님의 엄한 명령으로 그 당시 우리들이 통신교육 받을 때는 기합이라는 것이 없었다.

나는 1951년 4월 말 강원도 5사단 27연대 3대대 대대본부 무전병으로 배치받았다.

참혹한 전쟁터를 보다

내가 처음 5사단에 갔을 때 5사단은 가칠봉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서하리에서 경북 풍기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때는 전투 상황이라 야전식량을 자주 주었으며 어떤 때는 며칠 분을 한꺼번에 줘서 그럴 때는 “아… 또 후퇴로구나” 하고 미리 준비를 하곤 하였다. 그때 많은 전사자 시신과 그리고 팔다리가 잘린 중상의 부상병이 발생하는 끔찍한 전투 현장을 모두 봤다.

평소 잘 작동됐던 무전기가 전투만 벌어지면 이상하게 탈이 나서 난처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무전기가 불통되면 대대장으로부터 “야! 너 고치지 못하면, 넌 총살이야” 하는 고함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당시 지휘관들은 무전기를 다루는 통신병들을 많이 아껴주었다.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1952년 6월 12일 문산 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중수(인천영화중학교 4학년·현 대건고 1학년)의 묘를 참배하고 있는 3부자. 왼쪽부터 이경종 6·25 편찬위원, 이근표 6·25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6·25 편찬위원장).
신흥동 해광사에서 거행된 위령제 참석

우리 5사단은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후 다시 최전방으로 배치되어 전투 지역에서 휴전을 맞았으며, 이후 2년을 더한 군 생활 4년 3개월 만에 파란의 군 생활을 마치고 만기제대하였다.

제대한 1955년 12월 17일날 신흥동 해광사에서 거행된 위령제(慰靈祭)에 참석했는데, 나하고 인천학도의용대 영종지대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같이 남하하여 자원입대한 강기주·김우종·김덕용 3명의 이름이 전사자 명단에 있는 것을 봤다.

남기고 싶은 말

전사한 내 고향 친구들의 이름(강기주·김우종·김덕용)과 인천학도의용대의 호국(護國)활동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에 기록으로 남겨지는, 이 큰일을 이경종, 그리고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 2부자(父子)께서 해준다고 하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13회 계속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참전기 12회를 마치며

중학교 2학년 어린 나이에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하여 조국을 지켰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섭섭해하지 않았던 장순산은 인천이 고향입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68년 전 인천에서 있었던 슬픈 일

1950년 12월 18일 인천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자원입대한 인천 출신 중학생들은 약 2000명이었고, 그중 전사자는 정확히 208명이었다.

①중학교 1~3학년생 700여명은 통신병으로 참전하여, 약 35명이 전사하였다.

②중학교 4~6학년생 약 600명은 해병으로 참전하여, 100여명이 전사하였다.

③중학교 1~6학년생 약 700명이 육군으로 참전하여, 70여명이 전사하였다.

※인천학생 6·25 참전사 제1~제4권에 있는 ‘6·25전사 인천학생’편 참고.
2018-06-29 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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