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사과우체통/김응교

입력 : ㅣ 수정 : 2018-04-14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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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우체통/김응교

부탁할 것 딱 하나 있소


주소 좀 빌려주실 수 있으시죠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자식놈이나 아내한테, 만약

편지가 오면, 토요일에 갖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냉장고나 베란다, 볕 잘 드는 서재가 없더라도

개집이라도 좋으니

그저 우체통 달린 데서 사는 것

지금 내 삶의 목표입니다

우체통은 위대한 존재

아침마다 나는 우체통이기를 소망한다

어느 날 내 몸이 빠알간 사과우체통으로 환생하더라

풀숲이 풀벌레 감추듯

파탄 난 과거 품어주는 우체통이 되었더라

왕년의 비밀이든 신음 소리든

너그럽게 삼키며, 마침내

헤어졌던 부부가 입맞춤할 때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는,

빠알간 능금우체통 뺨이었더라

어른이 되면, 내 꿈은 단 하나, 우체통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딴 욕심은 없었다. ‘우체통 달린 데서 사는 것’이 삶의 목표라니. 나는 벼락 맞은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사이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았다. 그런데도 늘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저 초심에서 멀어진 탓이다. 소박함을 잃은 탓이다. 지금도 ‘사과우체통’으로 환생하기를 꿈꾸는 이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것이다.

장석주 시인
2018-04-1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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