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사회면] 장맛비에 무너진 부흥주택/손성진 논설주간

입력 : ㅣ 수정 : 2018-04-01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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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람치고 내 집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이른 지금 내 집 마련의 꿈은 수십년 전보다 더 멀어지고 있다. 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 주택 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정부는 1955년부터 대한주택영단(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 금융기관 등과 협력해 주택을 지어 공급했다. 서민들을 대상으로 공급한 주택에는 부흥주택(또는 국민주택), 후생주택(또는 재건주택), 희망주택 등의 이름이 붙었다. 최초의 공공주택이라고 할 수 있는 부흥주택이 들어선 곳은 서울의 성북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등 당시로서는 변두리 지역이었다. 많이 헐리고 본모습을 잃었지만 부흥주택은 청량리2동 홍릉 단지, 정릉동 ‘정든마을’, 이화동 낙산마을에 아직 남아 있다.
부흥주택 건설에는 육군 공병대가 동원됐다. 유엔한국재건단(UNKRA)의 지원에다 원자재도 원조에 의존했다. 1955년 12월 청량리 부흥주택 완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각부 장관, 서울시장이 총출동했다. 그러나 부흥주택은 분양가가 너무 높아 처음에는 신청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곧 상황이 바뀌었다. 1956년 4월 실시된 청량리와 신당동 부흥주택 입주자 모집에는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 30분 만에 분양이 완료됐다(경향신문 1956년 4월 12일자). 그러나 부흥주택을 둘러싼 말썽은 끊이지 않았다. 청량리의 부흥주택은 공병대가 맨바닥에 집만 지어 처음에는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고 살아야 했고 상·하수도도 없어 입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서울 신촌 100채의 부흥주택은 장맛비에 지은 지 1년도 못 돼 무너져 내렸다.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흙벽돌로 집을 지었기 때문이었다(동아일보 1956년 7월 2일자). 1956년 7월까지 전국에 지어진 흙벽돌 부흥주택 또는 재건주택은 7000여 가구에 이르렀다. 흙벽돌이 문제가 되자 그제야 시멘트로 바꿨다. 1959년에는 입주민들의 집단 청원 사태가 벌어졌다. 융자금 이자가 너무 높고 원금 상환 기간은 짧다는 것이었고, 국회에 특별조사소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했다.


부흥주택의 구조는 흥미롭다. 마루가 깔린 공간과 아동이 머무는 온돌방에 접해 과할 정도로 넓은 테라스가 있었다. 부엌에서 계단을 두 단 올라야 온돌방과 높이가 같아지는 것은 부엌에 취사와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변소에는 양변기가 있었고 욕실에는 둥근 설비가 눈길을 끌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목욕을 위해 사용했던 커다란 쇠가마다. 재래식 생활공간 위에 일본풍 생활기기가 담기고 위생설비와 외부 공간은 서구식인 복합 양식이었다. 설거지통과 찬장은 입주자가 마련해야 했다(‘거취와 기억’, 박철수). 사진은 부흥주택 입주 경쟁을 풍자한 만평.
2018-04-0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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