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해방촌에서] 말, 말, 말

입력 : ㅣ 수정 : 2018-03-26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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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 도시라는 디에프에 다녀온 적이 있다. 디에프는 바다를 굽어보는 백악 절벽이며 성당이며 볼거리가 많은 곳이라는데, 바다 냄새도 맡지 못하고 딸랑 해산물식당에서 밥만 먹고 왔다. 식사에 초대한 이는 노르망디 바다의 음울한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지극하게 토로했는데, 오후에 파리를 떠나 어둠이 내릴 때 도착한 데다 식당에서 훌쩍 시간이 지났고, 내내 비가 흩뿌리고 있어서 그랬을 테다. 파리를 벗어나기 전부터 내리던 비가 점점 거세졌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바다로 간다는 흥에 더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비의 장막을 뚫고 달리는 몽환적인 기분에 겨워서 내가 “와, 멋있다!” 환호성을 지르자 차를 몰던 초대자가 울컥해서 무안했던 순간이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으로서는 그렇잖아도 신경이 곤두서는데, 뭐 이런 덜떨어진 인간이 있나 싶었을 테다.
버터에 구운 커다란 바닷가재며 생굴이며 포도주를 곁들인 잘 차린 식탁에 둘러앉아 두 시간 넘게 떠들면서 먹었다. 한 초로의 신사가 계산대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머뭇머뭇 우리 자리에 오더니 수줍은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스페인 사람들이냐고. “아니다, 한국인이다” 라는 대답에 그는 역시 수줍은 미소를 띠고 갸웃거리던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는 동양인들이 스페인어로 떠드는 게 이상하고 참을 수 없이 궁금했던 게다. 스페인어도 한국어도 모를, 스페인어를 들어 본 적은 있을 프랑스 사람에게 우리가 하는 말이 스페인어처럼 들렸다는 게 신기했다. 일행 모두 표준 한국어, 서울 말씨 사람들인데 말이다. 음성학자라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까.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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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숙 시인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떠들썩하니 얘기를 주고받을 때, 의미를 소거하고 들어 본 적이 있다. 목소리에 실린 강세와 리듬을 음미하면서 외국인은 우리말을 이런 느낌으로 듣겠구나 생각했다. 길을 가다가 지나치는 사람들의 대화가 귀에 콕 박히는 때가 있다. 언젠가 연인 사이로 보이는 청소년 둘이 스쳐 가는데, “걔, 개~못생겼어!” 하는 여자애 말이 들렸다. 남자애와 나는 동시에 쿡, 웃음을 터뜨렸다. ‘개소리’ ‘개 같은’ 등 전에는 부정적으로 쓰였던 ‘개’가 요즘엔 최상급을 표하는 접두사로, 종종 긍정적으로 쓰인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말이지만, 단박 ‘개이득’이 떠오른다. 어쩜 그리도 뜻이 확 와 닿을까. 감각적으로 와 닿는 신조어들은 대개 소위 ‘급식체’에서 비롯된 말일 테다. 아, 청소년! 최근에 나온 사노 요코의 이야기집 ‘꿈틀꿈틀 해줘 고릴라야. 그저 돼지지만’에서 가장 짧은, 두 줄짜리 이야기 ‘벌레’를 읽고 감탄했다. ‘송충이라든가 애벌레라고 부르지 말아 줄래요?/우리는 그저 사춘기일 뿐이에요.’ ‘중2병’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이야기다.

미국에 사는 내 조카 하나가 사춘기일 때 툭하면 건방진 표정으로 뱉던 말이 “생큐 포 너싱”(Thank you for nothing)이었다. 나는 영어를 거의 못한다. 그 애가 제 동생과 서울에 왔던 10여년 전(방학을 맞은 애들이 제 친구들과 즐거운 계획이 있어서 오기 싫어했는데, 언니가 혼자 다녀가다 비행기 사고가 나서 애들 고아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끌고 왔다) 사랑하는 조카들과 제대로 얘기를 나누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영어 공부를 하자고 결심했는데 이때껏 실행하지 못했다. 지난 2월에 평창동계올림픽을 본다고 그 건방졌던 조카가 다녀갔다. 한마디, 한마디, 머리에 쥐가 나도록 쥐어짜는데, 귀에 쥐가 났을 조카는 간간이 차마 못 들을 말인 듯 내 영어를 바로잡아 주었다.

사노 요코가 이야기의 달인이라면 우리 시인 김언은 언어의 달인이다. 그의 시집 ‘한 문장’은 이 시인이 언어 운용에 얼마나 빼어난 재능을 가졌는지 절감시킨다. ‘간장공장 공장장은’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얼마나 바르고 빠르게 읽는지 시합하던 생각이 난다. ‘한 문장’은 언어폐색증이 온 시인들의 굳은 혀나 굳은 뇌를 풀어 줘서 글쓰기 시동을 거는 데 썩 유용한 시집이라고 하면 김언에게 실례일까. ‘실례’라고 하니, 그 옛날 한 친구가 나이트클럽에서 외국인과 부딪치자 농담이랍시고 던진 “익스큐즈 유!”가 생각난다.
2018-03-2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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