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의 아침] 그럼프 할배의 답장/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입력 : ㅣ 수정 : 2018-03-2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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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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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이제 세계 정세는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스케치의 선(線)처럼 보인다. 그렇게 끔찍하고 위험한 것만 아니라면 재미있을 것 같다.”

평창동계올림픽 폐막 다음날 저번에 이 난을 통해 소개드렸던 핀란드의 그럼프 할배(사실은 저자 투오마스 퀴뢰)에게 이메일로 질문지를 보냈다.

‘한국에 온 괴짜 노인 그럼프’ 집필을 위해 지난해 8월 서울과 평창 등을 찾았을 때 퀴뢰의 여정을 ‘코디’했던 방송인 페트리 칼리올라가 핀란드어로 옮겨 보냈는데 퀴뢰는 스키 여행을 다녀오느라 늦었다며 지난 2일에야 답장을 보내왔다.

책의 뼈대는 딸의 서울 유학 살이를 살피러 온 할배가 아시아인들이 생소하기 짝이 없는 동계올림픽을 잘 치를지 염려해 평창 경기장 등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북한과 미국이 언제라도 핵무기 버튼을 누를 것 같은 분위기에서 김정은의 신년사로 급반전을 이뤘지만 성공 개최가 여러 모로 의심됐던 평창동계올림픽이 잘 치러진 뒤 한반도에는 해빙의 기운이 도저하다.

책을 쓰던 시점과 확 달라진 정세 때문에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할배가 어질어질한 느낌을 갖지 않았는지부터 물었다.

퀴뢰는 “올림픽에서는 선전 효과가 너무 커 정치와 스포츠가 혼동된다. 이번 대회도 평화를 조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선전적인 구석을 배제할 수 없었다. 북한 선수들을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으로 뛰게 해야 했는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올림픽 때 적어도 하늘에는 핵폭탄이 없었다”고 돌아봤다.

또 “사람과 사회, 국가 사이에는 항상 의사 소통이 필요하다. 협박은 유치하고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북한의 뚱뚱한 소년과 대걸레 머리를 한 양키 대통령이 핵무기 크기를 잴 때 내 마음은 비명을 질렀고, 둘을 다시 유치원에 보내고만 싶었다”고 꼬집었다.

그의 말마따나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던 선들이 놀랍게도 드러나고 있다. 한국이 북한과 미국 사이 운전자 역할을 해 다음달 남북 정상회담, 그 뒤 북ㆍ미 정상회담이 준비되고 있다. 뒤늦게 일본이 그 흐름에 자신들을 넣어 달라고 매달리는 상황까지 됐다.

정확히 퀴뢰가 얘기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설렘의 감정으로 바라보는 스케치 작업에 올림픽이, 스포츠가 기여한 점이 있어 자부심을 느낀다. 평창동계패럴림픽이 공존의 인식을 조금 틔워 준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반갑다.

아시아인들이 동계올림픽을 잘 치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물었더니 “아시아인들에게는 의지와 재원, 성장하는 경제, 자신의 재능을 세계에 보여 주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반면 유럽은 ‘녹슨 노인’과 비슷하고, 또 그럼프 노인처럼 옛날이 더 좋다고만 여긴다”고 지적했다.

기자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우리가 몸소 그려 나간다는 것이 실로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는 말을 보태고 싶다.

2006년에도 서울을 찾았던 퀴뢰는 “위대한 올림픽을 조직해 줘 감사하다. 핀란드는 현재 영하 25도인데 한국은 조금 더 따뜻하길 바란다”고 했다. 마침 춘분인 어제, 눈이 내렸다.

봄을 앞당기는 서설이었으면 한다.

bsnim@seoul.co.kr
2018-03-2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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