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의 아침] 핀란드의 그럼프 할배께/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입력 : ㅣ 수정 : 2018-02-1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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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던 대로 정말 까칠하시더군요. 올림픽 개막을 몇 시간 앞두고 소설의 첫 줄을 읽자마자 빵 터졌습니다. 뭐라고요? 새파랗게 젊은 친구가 권력을 잡았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지 않으셨다고요?
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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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핀란드 썰렁 유머의 제왕인 저자 투오마스 퀴뢰(44)가 햇빛이든 파리 소리든 젊은이들의 게으름 때문이든 늘 기분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 친구들을 모델로 창조한 괴짜 노인 캐릭터시니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분 묘하게 정이 가고 끌립니다. 지하철에서 매일 마주치는 우리네 할배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는 화난 뚱보 소년과 대걸레 머리의 양키 대통령이 날 선 핵위협 발언을 쏟아낼 때 손녀의 서울 유학살이도 살필 겸 동계스포츠 선진국 국민답게 스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시아인들이 동계올림픽을 잘 치를까 싶어 둘러본다는 것이 소설의 기둥입니다.

저자는 2년 전 머릿속으로 구상을 끝내고 자료 조사를 마친 뒤 3부작 중 1부 ‘괴짜 노인 그럼프’를 옮겨 낸 국내 출판사에 방문 의사를 전달해 지난해 8월 3박 4일 동안 서울과 평창, 강릉을 돌아보고 두세 달 뒤 원고를 보내왔답니다.

열세 살 때 태권도를 배웠고 한국 문화를 체감하고 싶다는 이유로 2006년 찾았던 내력을 감안하더라도 고작 나흘 돌아보고 이런 책을 쓰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정도 많고 참견도 많습니다. 할배의 눈에 한국이란 요상한 나라지요.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데 사람들은 만사태평이고, 편의점 문을 24시간 열며, 화장실에서 요상한 음악이 흘러나오거든요. 물론 삐딱한 시선과 과도하게 우릴 깔보는 듯해 불편할 때가 적지 않은데 문화 차이 때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회 첫날 점심 때쯤 책을 모두 읽고 난 뒤 궁금해졌습니다. 핀란드에 돌아간 작가가 원고를 마감한 지 넉달 만에 느낀 어리둥절함은 어떨까 하는 것이었지요.

세상에나, 14일만 해도 남북 단일팀이 일본과 여자 아이스하키 대결을 벌이는데 한반도기와 함께 태극기 응원이 펼쳐지고 북한 피겨 선수들이 페어 경기를 마친 뒤 “저희 짝패(파트너)가 잘해 줘서”라고 말하는 장면이 한국 안방에 중계되는 현실 말이지요.

대회 개회식에 남과 북이 공동 입장할 때 기립하지 않았다고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외교적으로 패배했으며 “유치한 할배”라고 야단맞는 것도 참 얄궂지요.

이곳에 사는 우리도 어지러운데 23장 제목을 ‘시대는 변한다’고 적었던 그럼프 노인을 비롯해 세상 어르신들은 얼마나 당황스럽고 난감할까요?

그래서 전 대회를 마친 뒤 저자 퀴뢰와 인터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부담을 느낀답니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냐고요?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174쪽에 털모자 외교의 효능이 나오거든요. 그리고 다음 쪽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누가 더 세게, 더 높이, 더 빠르게 가는지 겨루기에는 세계 정치보다 올림픽이 훨씬 더 좋은 자리’라고요.

그리고 추신이 있습니다. 제목은 ‘뚱뚱한 소년에게’. 설 연휴 평창 중계 보며 한번들 읽어 보세요.

bsnim@seoul.co.kr
2018-02-1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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