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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가난 포르노 (최고나)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가난 포르노 (최고나)

입력 2017-12-31 17:18
업데이트 2017-12-3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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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쪽방촌 느낌의 골방.

원근감을 주기 위해 사선으로 놓인 방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관객석에서 앞쪽 방은 들어찰 곳 없이 빽빽한 쓰레기(보기에 따라서 생활용품으로 보일 수도 있다)가 들어차 있으며 몸 하나 간신히 뉘일 정도로 좁은 공간이 쌓아 놓은 물건들을 중심으로 둥그렇다. 그 옆방은 그에 비해 제법 집의 형태를 갖추었다. 티브이도 있고 버너도 있고 조그만 냉장고와 작은 침대도 있다. 앞쪽 방 위쪽으로 CCTV가 연결되어 있다. 그 화면은 뒷방 티브이를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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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휴대폰을 귀에 대고 옆집을 살피는 듯 창밖을 힐끔 본다.

남 (통화 중) 모르긴 해도 강남에 빌딩 두어 채는 가지고 있을 거라니까.

구라 아니야. 몇 달간 이 몸이 뭐빠지게 고생해서 알아낸 거지.

원래 있는 사람들이 지 꺼 꽉 쥐고 안 쓰잖아. 그 할매 골골거리는 꼴이 길어봐야 두 달이야, 두 달. 두 달 후면 여기 청산하고 우리 가족 넷이서 알콩달콩….

만삭의 여, 양손 가득 짐을 가지고 들어선다. 손이 모자라 휴대폰은 어깨로 귀에 댄 채다.

여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남 얘기 다 끝났잖아.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 그냥 우리 지금은(여자의 배 내려다 보며) 알콩이랑 달콩이만 생각하자.

여 알콩하고 달콩한 그 기간이 두 달 남았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구?

남 그럼! 당연하지!

여 (짐 내려놓고) 당연은 무슨! 지금 상황만 봐도 그래. 너랑 나랑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살펴봐도 삼시세끼 꼬박 챙겨 드셔, 새벽기도 빠짐없이 참석하셔, 아침마다 정정하게 일 나가셔,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너랑 알콩달콩인데?

남 너 오빠, 못 믿어?

여 응. (사이) 그러다 천수해로 하면 어쩌려고?

남 확실하다니까. 걷는 폼이 골골한 게 먹는 약도 확연히 늘어났고, 새벽에 잔기침도 엄청나게 심해졌어. 길어봐야 올해 설까지야.

여 그래도….

남 (여자의 말 막으며) 어쩔 수 없잖아.

여 (흘겨보며 짐 내민다) 이거나 받아.

남 (물건 받아들며) 이게 뭐야? 생활비도 없다면서.

여 복지관에서. 겨울이라고 이것저것 챙겨주네. 확실히 강남이 좋긴 좋아. 나눠주는 것부터가 격이 달라. 쌀 하나를 줘도 꼭 이천 쌀만 준다니까.

남, 문 옆으로 쌀가마니랑 받아 온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여, 봉투 안을 뒤적거리다 과자 봉지를 꺼내든다.

여 (과자를 우적거리며 바닥 짚는다) 아직 한 겨울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바닥이 냉골이네.

남 수도관 동파가 올해는 좀 빨리 됐어. 그래도 나는 여기 몇 년 살았다고 금방 적응되는 거 있지. (걱정스러운) 자기, 많이 불편해?

여 아냐. 나도 전에 살던 고시원보단 백밴 나은데 뭐. 거긴 주방을 공동으로 썼는데, 꼭 내가 사놓은 김치만 훔쳐가던 놈이 있었어. 의심 가는 놈이 있긴 한데 확실하게 단정은 못 짓겠구. 그렇다구 무턱대고 범인으로 몰수도 없고. 그래서 나중엔 김치를 아예 안 샀었지. 자기, 김치 없는 라면 먹어 봤어? 진짜 (고개를 저으며) 사람이 할 짓이 못 돼.

남 그 자식은? 가만 뒀어?

여 가만 두긴. 나중에 여자 속옷 훔치다가 덜미 잡혀서 개망신 당하고 쫓겨났어.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남 미친놈이네. (침대 가리키며) 자기야, 여기 앉아. 여긴 좀 나을 거야.

여 (침대 위로 올라간다.) 할머닌 괜찮을까? 뜨거운 물은 고사하고 입 안에서 김이 나와. (호호 불며) 자기야, 이거 보여?

남 (옷장을 뒤적거려 커다란 점퍼를 뺀다. 이때 짐이 쏟아져 문 앞에 약간의 옷들이 쌓이게 된다. 자신도 입고 여자에게도 두꺼운 점퍼 하나를 건넨다) 이거 입어. 괜히 감기 걸리지 말구.

여 (점퍼를 입으며 침대 위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워낙 건강 체질이라 웬만한 추위에는 꿈쩍도 안 하는데 자기랑 살림 합치고부터 몸이 약해졌어. 임신 때문인가 아침부터 삭신도 쑤시고 목도 아프고 머리도 지끈거리는 게 조만간 감기가 올 것 같아.

남 (버럭) 감기? 그러게 독감예방접종 하랬잖아!

여 삼만 팔천 원이야. 그걸 어떻게 맞아?

남 그러다 약값이 더 나는 거 몰라? 그깟 돈 몇 푼 아끼려다가 병원비, 약값 더 나가는 거라고! 진짜 짜증 나게! (바닥에 쌓인 비닐봉지를 걷어찬다)

여 야!

남 뭐!

여 너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

남 짓거리? 짓거리? 다시 한번 말해 봐. 남편한테 짓거리?

여 그래. 짓거리라 했다.

남 말하는 본새하곤. 그러니까 네가 어디 가서 고등학교 중퇴자란 소릴 듣는 거야.

여 고졸인 넌 뭐 얼마나 그렇게 대단한데?

남 이거 왜 이래? 나 전문대까지 휴학했어. 너하곤 완전 급이 달라. 이번에 네가 임신만 안 했어도 나 학교 복학했다.

여 얼씨구? 등록금은 있냐?

남 …. 까짓것 벌면 되지.

여 (코웃음 친다) 퍽이나 벌겠다? 지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게.

남 으이구! (자신의 머리 때리며) 그날 밤 내가 왜 술을 마셨는지 그날 밤이 내 인생 천추의 한이다, 한! 이래서 몸 굴리는 애들하곤 함부로 노는 게 아닌데.

여 (벌떡 일어나 노려본다) 그 몸은 나 혼자 굴렀냐? 애는 나 혼자 만들었고? 한 번만 자달라고 졸라 될 땐 언제고. (배 만지며) 알콩아, 달콩아, 봤지? 네 아빠가 저렇게 병신 같은 놈이란다.

남 (애써 누르며) 됐다, 됐어.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내가 저 고등학교도 못 나온 년이랑 무슨 얘길 하냐?

남, 옷을 추려 입고 밖을 나가려는데, 기계음이 들린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기계음은 내내 남과 여의 집에서만 들린다)

여, 재빠르게 리모컨 집어 티브이를 켠다.

남, 언제 그랬냐는 듯 잽싸게 달려와 티브이 앞에 선다.

티브이 화면 가득 노파의 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언제 싸웠냐는 듯) 다리를 절고 있네.

남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언제 싸웠냐는 듯) 빙판길에 넘어졌나?

노파, 문을 열고 들어선다. 머리 위에 짐을 얹고 양손에도 한 가득 짐을 들고 있다.

다리를 절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여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양 손에 짐이 한 가득이야.

남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어디 폐지 같은 거나 주워 오는 거지.

남, 눈치 보며 슬금슬금 여의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여, 기다렸다는 듯 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과자를 우적거리며 영화 감상하듯 나란히 모니터에 집중하는 두 사람

여 저런 건 도대체 어디에서 줍는 거야?

남 아파트 쓰레기통, 상가 앞, 식당 뒤, 구석구석 뒤지겠지.

여 저게 진짜 돈이 될까?

남 진종일 쌔빠지게 고생하면 끽해야 하루 5천 원 정도?

여 그렇게나 적어?

남 몸만 죽어나는 거지.

노파, 가져온 물건들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금방이라도 쌓인 물건들이 넘어질 듯 위태하다.

(혹은 넘어져도 무방하다)

여 저러다 정말 큰일 나시겠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남 저런 게 바로 궁상이야. 사는 거 자체가 민폐 인생.

여 너무 그러지 마. 찾아오는 가족도 없다는데 안 됐잖아.

남 아들이 하나 있긴 한데 연 끊은 지 꽤나 된 거 같아.

여 하나밖에 없는 자식새끼, 금이야 옥이야 길렀는데 머리 커서 귀찮다고 외면하고?

남 뻔한 스토리지.

여 사람들은 왜 늘 뻔한 것에 속는 걸까?

남 견디려고 그러는 거지. 그래야 견딜 수 있거든.

여 그래서 수집하나? 헛헛한 마음을 물건으로.

남 마음이 물건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그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거야?

여 오빠.

남 응?

여 난 저렇게 살기 싫어.

남 (여자의 배 쓰다듬으며) 내 자식도 저렇게는 살면 안 돼.

천장에서 쿵쿵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 (하늘 올려보며 남자의 곁으로 바짝 붙는다) 뭐지?

남 저놈의 쥐새끼들.

여 쥐야?

남 사람 없을 땐 내내 조용하다가 꼭 들어오면 저 난리지.

(둘러보다 빗자루를 집어 천장을 하늘로 쿵쿵 찌르면 이내 조용해진다)

조용히 해, 새끼들아!

여 (번뜩 뭔가 생각난 듯 남자의 빗자루를 빼앗는다) 오빠, 줘 봐.

(천장 환기구를 열어 그 안을 기웃거린다.)

남 뭐해?

여 (이내 뭔가를 손에 쥐고 내려온다) 잡았다!

남 (여자에게 멀찍이 떨어지며) 잡았다구? 쥐를?

여 (의기양양) 응.

남 뭐하려고?

여 할머니 갖다 주게. 남할머닐?

여 적을 알고 나를 알면 그때부터 백전백승! 게임 끝이야.

여, 남자가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남 야! 자기야!

여, 어느새 옆집으로 넘어갔다. 노파 집 대문을 두드린다.

남, 티브이를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본다.

여 할머니!

노파 목소리 뉘슈?

여 저어, 옆집인데요. 잠깐 문 좀 열어주실래요?

노파, 절룩거리며 느리게 현관 앞을 걸어간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문 살짝 열고 고개만 삐죽 내민다. 경계하는 느낌이다.) 뭔디 그랴?

여 수도관이 동파 돼서 걱정 돼서 한 번 와봤어요. 많이 추우시죠?

노파 겨울인디 추운 건 당연하지.

여 그래서! (쥐 내밀며) 이거라도 가지고 계시라고요. 만져보세요.

노파 (떠밀리듯 받아들며) 이게 뭔디?

여 쥐요.

노파 쥐?

여 살아있어요, 아직 따뜻하구요.

노파 (의심스러운) 애기 엄만 안 춥가니?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난 몸땡아리, 애기 엄마도 솔찬히 추울 텐디.

여 전 괜찮아요. 옆에 남자친구도 있구,

(배를 내려다보며)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돌아가려면)

노파 (문을 처음보다 조금 활짝 연다) 저기, 색시!

여 (돌아보면) 네?

노파 나 그런 사람 아녀!

여 뭐가요?

노파 선물을 받았으면 은혜를 갚아야지. 쪼매만 기다려. 뭐라도 줄 거 없나 찾아 볼랑게. 난 천성이 신세 지곤 못 사는 성격이여.

노파, 집 안으로 들어간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노파, 물건들 사이를 뒤지기 시작한다. 둘러보다 한 묶음의 짐 보따리를 내밀며,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이불 있어?

여 네?

노파 새댁 집에 이불 있느냐고?

여 (생각하다) 하나 있긴 한데 그게 사계절용이라 그렇게 따뜻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쓸 만해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추우면 우리 자기랑 꼬옥 껴안고 있기도 하고….

노파 (자랑스럽게) 날도 추운디 한 사람당 두 개 정돈 덮어야지. 우리 집엔 이불 엄청 많아. 이것 말고도 여덟 개나 더 있는디?

여 (받아들며 감동이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할머닌 정말 마음이 따뜻하시네요.

노파 세상 혼자 살간? 서로 돕고 사는 기 세상이지. 추워. 얼른 가.

노파, 먼저 들어간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여, 자신만한 커다란 이불을 가지고 들어온다.

여 (한숨 길게 내쉰다) 아후, 안 되겠어. 도저히 못하겠어.

남 (이불을 받아들며) 왜 또 그래?

여 백퍼센트 코튼 마크잖아. 오리털도 아닌 거위털이야. 이게 얼마나 비싼 건지 오빠가 알기나 해?

남 할머니가 주신 거야?

여 그래. 저쪽 집에 엄청 많대.

남 자기야,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강하게 다져야 해. 생각해 봐, 저 할머니 돌아가시면 그게 전부 우리 거야. 이불 깔고 덮고 지지고 볶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니까.

여 몰라. 암튼 기분이 안 좋아.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도저히 그 일은 못하겠어. 이건 옳은 짓이 아냐. 우리도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취직 같은 거 해 보는 거 어때?

남 아니. 구직은 더이상 희망이 없어.

여 오빠, 그러지 말고 일용직이라도 구해 보자.

남 (여자의 배를 내려다보며) 이 몸을 해 가지고?

여 우리 사정 얘기하면 받아주는 데가 있을 거야.

(남자의 손 잡으며) 오빠….

남 ….

여 제발….

남 …. 넌 그럼 빠져. 이번 일은 나 혼자서 할 테니까.

여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우린 한 몸이야. 이 아이들 낳기로 결정한 날 잊었어? 뭐든 함께하기로 약속했었잖아.

남 그랬었지.

여 우린 그때 너무 힘들었어.

남 알아.

여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부모도 없고. 빽도 없고.

남 아무것도 없었지, 우린.

여 그래도 행복했었잖아.

남 사랑만이 전부였던 시기였지.

여 극복하자. 할 수 있어. 노력하면 어떤 일도 다 이뤄낼 수 있다니까.

남 개소리야.

여 오빤 옆집 할머니 보면 친할머니 생각 안 나?

오빠도 할머니가 키워 주셨다며?

남 그때 생각 따윈 하고 싶지 않아.

여 난 가끔 그 시절이 그립던데….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가 나았던 거 같아. 너무 많이 아는 지금은….

남 할머닌 나를 학대했어.

여 학대?

남 어린 꼬마였지. 아빠 손에 이끌려 왔던 날, 아빠 등 뒤로 숨었던 날, 할머니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나를 질질 끌고 갔어. 그리곤 내가 아빠 인생을 망쳤다며 끝없는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지.

여 오빠, 옆집 할머닌 오빠네 할머니와는 달라. 이렇게 이불도 주고 정말 좋으신 분이라고.

남 아무리 그래도 나쁜 점은 분명 있을 거야. 옆집 할머니의 나쁜 점을 한 번 생각해 봐.

여 할머니의 나쁜 점? (생각하다가) 예를 들면…?

남 예를 들면…. (생각났다) 저장강박! 저렇게 쓰지도 못할 거 쟁여만 놔서 이웃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잖아. 저것도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티비에서 본 거 같아. 기억 안 나? 전에 복지관에서 도배 새로 해준다고 했을 때….

여 (조금 솔깃하다) 아, 그때! 난리부르스도 아니었지. 문 앞에 대자로 쫙 드러누워가지고.

남 그래! (좀 장황하게) 물건들 좀 치우려고 그러면, “차라리 날 밟고 가라! 이것들아!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저 물건들 못 뺏는다!” 아니, 지가 무슨 이순신이야? 잔다르크야? 저 중에 쓸 만한 물건이 어디 있다고 저 난린지. 저런 건 욕심이 많다는 반증이야.

여 욕심?

남 그래. 스크루지보다 더 지독한 짠순이. 집에 물건들은 숨기면서 정작 중요할 땐 나 몰라라 외면하지. 저러다 결국 저 쓰레기 더미에 깔려 돌아가실 거야. 자기 꺼 꽉 움켜쥐고 남의 거 야금야금 훔치면서.

여 (놀라) 저 물건들이 훔친 거야?

남 훔친 거지. 박스 뒤지고, 남의 물건 뒤지고, 더 가난한 사람들 기회 뺏으면서.

여 (동조됐다) 몰랐어. 할머니가 그런 사람인 줄.

남 (여자의 손 잡으며) 자기야, 그러니까 마음 약해지면 안 돼. 우리도 남들처럼 살아야지. 혼인신고도 제대로 하고, 애들 호적도 제대로 올리고. 남들 사는 만큼 딱 그만큼만 살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노크 소리) 색시, 안에 있어?

여 누구지?

남 할머니다!

노 파색시!

여 왜 온 거지? 혹시 우리의 계획을 눈치채신 건가?

(남자를 쿡 찌르며) 오빠! 오빠가 나가봐. 얼른.

남 (경계하며 문 쪽으로 다가선다.) 누구시죠?

노파 옆집이외다. 색시 있슈?

여,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남 잠깐 이 앞에 나갔는데요. 왜 그러시는지…?

노파 구청에서 라면 한 박스를 선물로다 줬는디. 내가 밀가리를 먹으면 위가 쓰려.

남 (여전히 경계하며) 그래서요?

노파 색시 먹을랑가 물어볼라고 그러지.

남 무슨 라면인데요?

노파 진라면이랑 너구리랑 짜파게티랑 뭐 이것저것 섞였는디?

남, 여자를 바라보면 여,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남 (찜찜하지만 문을 살짝 연다) 뭘 이런 걸 다 주시고….

노파 (고개 들이밀며) 애기 엄만 어디 멀리 갔수?

여 (잽싸게 이불로 머리를 덮는다)

남 슈퍼 갔어요. 라면 사러.

노파 아이고, 잘 됐고만. 내가 그 시간에 딱 맞춰 왔네. 얼른 전화혀서 라면 사지 말고 오라 그랴. 신혼부부들이 무신 돈이 얼마나 있다고. 얼른 전화혀.

남 네에. 그럴게요.

노파 (가려다가 돌아본다) 임신했을 땐 특히 남자가 잘해야 혀. 먹고 싶다는 거 있담 다 멕이구, 짜증내도 것도 일절 받아주고. 남편이 잘해야 그 기운에 평생 살아. 늙은이 말이라고 무시허지 말구 새겨들어. 알겄지?

남 네, 그럴게요. (하다가) 근데 겨울엔 딸기를 못 구하잖아요.

노파 색시가 딸기가 먹고 싶대?

남 네에.

노파 딸인가 보네. 딸기가 땡기는 걸 보니.

남 (헤벌쭉, 딸 생각에 기분 좋다) 딸이래요, 딸. 것도 쌍으로다.

노파 둘씩이나 들어 있어?

남 (헤벌쭉) 네에. 그렇다네요.

노파 아이고, 장해라. 장해. 참말로 장하네 그려.

남 (꾸벅 인사하며) 할머니, 라면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남, 라면박스를 입구 옆에 놓는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여 (뒤집어쓴 이불 밖으로 빠져나오며) 갔어?

남 (복잡하다) 응.

여 할머니 정말 나쁜 사람 맞아?

남 (찜찜하다) 그렇다니까.

여 이렇게 이불에 라면까지 주셨는데도?

남 (멈칫) 의도를 생각해야지. 왜 이런 조건 없는 나눔을 베푸는지.

여 조건 없는 나눔?

남 세상엔 공짜란 없는 법이야. 본디 그렇게 세상은 굴러가게 돼 있어. 근데 이거 봐봐. 할머니가 주신 것들.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어?

여 (생각하다 머리를 쥐어 잡으며) 정말 모르겠어.

남 중졸인 네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운 문제일 거야. 좀더 깊게 생각해 봐.

여 (생각하다) 할머니에게 실망했어.

남 (환희에 차) 생각났어?

여 임산부에게 라면을 먹으라니. 딸기는 못 줘도 라면을 먹으라고 권하는 건 아니잖아. 라면은 성인병 고혈압의 원인이야. 과다한 나트륨 함량으로 내 아이들이 아토피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지.

남 그래! 바로 그거야!

여 (여자 뭔가를 깨달은 듯 놀라 입을 막는다) 설마 할머니가 이 모든 걸 꾸민 거야?

남 그, 그런 거지.

여 꼴랑 라면 하나 주면서 생색은 있는 대로 다 내면서?

남 드디어 깨달았구나.

여 오빠 말이 맞았어. 저 할머닌 나쁜 사람이야.

남 그럼.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여 내 앞에선 위해주는 척, 순진한 척하면서 뒤로는 엄청난 계략을 꾸미고 계셨던 거야.

남 이제 말이 통하는구나.

여 할머니 재산이 얼마라고?

남 한 십억쯤 되려나?

여 확실한 거야?

남 (당황스러운) 그냥, 사람들 얘기가…. 그러지 않겠느냐. 풍문이지, 풍문.

여 강남에 빌딩이 두 개라며? 설마 그것밖에 안 되겠어?

아아, 할머니가 빨리 뒈져버렸음 좋겠어.

남 걱정 마. 조만간 그렇게 될 테니까. 그전에 우리는 먼저 선수 치고 튀자. 할머니 재산 홀라당 챙겨가지고.

여 몇 주 후에나 발견되시겠지? 이참에 단단히 한몫 챙기자고.

남 우리가 먼저 발견한 걸 고마워할지도 몰라.

여 무연고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남 장례식은 고사하고, 저 많은 짐들 정리하려면 국가도 고생이지.

여 맞아. 저 중에 쓸만한 건 전부 처분하고 할머니 통장이랑 국가보조금 남은 거랑 이것저것 모아서 한몫 단단히 챙기자고.

남 그 돈으로 알콩이랑 달콩이 피아노랑 발레를 가르치는 건 어때?

여 피아노랑 발레?

남 내 오랜 로망이거든. 알콩이는 피아노를 치고 달콩이는 그 옆에서 발레를 하고. 나랑 넌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완벽하지 않니?

여 (상상하다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죽이자!

남 (놀라) 뭐?

여 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 지금 당장 죽이자! 시간이 얼마 없어. 좀 있으면 알콩이와 달콩이가 태어날 거라고!

남 그래도 지금은 너무 이르잖아.

여 이르긴 뭐가 일러? 당장에 실행에 옮겨야지.

(찬장을 뒤져 식칼을 꺼낸다. 금방이라도 실행에 옮길 듯 위협적인 표정이다)

남 자, 자기야. 왜 그래?

여 시간이 얼마 없다니까. 우리 애들은 우리처럼 자라게 할 순 없잖아. 오빠.

남 그래도….

여 일단, 최고급 산후조리원부터 예약해줘. 거기에서 인맥을 쌓아야지.

남 결심이 선거야?

여 응!

남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사라지고?

여 그딴 거 개나 주라 그래!

남 그래도 좀 그렇잖아. 살인과 고독사는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여 (비장하다) 아니, 나는 해야겠어.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때야.

여, 성큼성큼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데 남, 급하게 현관문을 막아선다.

남 자! 잠깐!

여 왜 이래? 비켜.

남 어쩌면 우리 할머니보다 옆집 할머니가 조금은 더 나은 사림일지도 몰라.

여 무슨 소리야? 언제는 나쁜 사람이라며.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 등쳐 먹는.

남 그건…. 그냥 내 생각인 거고.

여 아니. 아무리 자기가 진실을 외면해도 그건 명백한 사실이야.

남 자기야. 진정하고 조금만 기다리자.

여 뱃속의 아이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 한다니까.

남 알아!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얼마 안 남았어. 금방 돌아가실 거야.

여 알콩달콩이도 시간이 없어.

남 그래도 애들은 어리니까 아직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어쩌면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을지도 몰라.

여 위선 좀 그만 떨어. 알콩이 달콩이도 우리처럼 살게 할래? 우리처럼 거지 같은 옷 입고 거지같은 방 안에서 지내면서. 입에서 김 나와서 겨울이면 끔찍하고. 여름이면 뜨거운 선풍기 끌어안고 지내면서. 거지 같은 학교 졸업해서 쥐꼬리만 한 월급 못 받을까 전전긍긍하고. 외식은커녕 맨날 돈돈 거리면서 지내겠지. 남들 다 다니는 학원 한 번 못 보내고, 학교도 간신히 졸업하고, 어쩜 못할지도 몰라. 그렇게 눈치 보며 살게 할 거야?

남 돈만 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잖아. 우리 둘이 사랑하는 모습 보여주고 우리가 떳떳하면 자식들도 언젠간 알 거야. 언젠간 부모의 노력과 수고를 이해하는 날이 오겠지.

여 떳떳해? 우리가 뭐가 떳떳한데? 복지관에서 공짜밥 얻어오는 게 떳떳한 거야? 예방접종비용 비싸 못 맞는 게 떳떳한 거야?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떳떳한 지 알려줘 봐. 내 손에 싸구려 반지라도 하나 끼워주고 남들 하는 만큼 결혼식도 제대로 올리려면 그 망할 놈의 돈이 필요하다고 난! 네가 뭐라고 떠들던 간에 난 오늘 저 할머닐 죽여야겠어!

여, 남자를 밀어낸다. 남, 막았던 자리 무너지듯 자리를 비켜선다.

여, 밖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거칠게 현관문을 두드린다. 한 손엔 칼을 숨기듯 쥐고 있다.

여 할! 머! 니!

노파, 느리게 현관으로 다가온다.

노파 옆집 색신가?

기계음 김분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문을 활짝 열며) 색시, 마침 잘 왔어. 들어와 봐, 어여.

여, 무시무시한 얼굴이다. 성큼성큼 노파 집 안으로 들어간다.

좁은 집 안, 서로를 마주 보고 간신히 선 노파와 여자

그 가운데 딸기 한 팩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여, 칼을 빼들고 찌르려다 딸기를 보고 멈칫하는데,

노파 먹고 싶었다며?

여 네?

노파 신랑한테 다 들었어. 딸기 먹고 싶다 그랬다며.

여 (냉랭한) 그런데요?

노파 요리하다 온겨?

여 뭐여?

노파 지금 칼 들고 서 있잔여.

여 (칼을 숨기며) 대파 있으세요?

노파 대파?

여 라면에 넣으려고 보니 대파가 마침 똑 떨어져서요.

노파 글씨. 대파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겄네. 혼자 사는 노인네라 집 안에 마땅한 게 없어. 배고프면 먹고 안 고프면 굶고 그러니께.

노파, 쭈그려 앉아 냉장고를 연다. 이것저것 뒤적거린다.

여, 딸기 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노파 (냉장고 뒤지며) 찬물에다 밥이나 말아먹지. 음식이 변변찮해. 대파가 있을라나 모르겄네. (돌아보며) 대파 대신 양판 안 되야?

여 그거라도 주시면 고맙구요.

노파, 양파를 한 망 건네준다. 계란, 버섯 이것저것 한 움큼 들려 있다.

여, 얼떨결에 받아든다.

노파 딸이라매?

여 네?

노파 남편이 많이 좋아하드라고.

여 그 자식이 임신한 걸 좋아해요?

노파 가장의 위치가 원래 그런 거여. 좋으면서 티도 못 내고 맘속 복잡허고. 섭섭하고 서운한 게 있더라도 자네가 넓은 맴으로다 이해혀야지.

여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노파 한 인간을 다른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제. 용기 잃지 말구 악착같이 살어잉.

여 ….

노파, 딸기를 까 여자의 입에 넣어준다.

노파 어뗘? 맛이?

여 달아요, 아주.

노파 내가 샥시가 딸기 좋아하는 걸 우찌 알았겠어? 신랑이 챙겨주고 싶은디 맘처럼 되지 않응게 속상한 겨. 색시도 알지? 신랑이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거.

여 네에.

노파 겨울엔 딸기가 없어. 비싸기도 하고. 우리 같은 사람은 먹기 쉽지 않제. 맴이야 그렇지 않겄지만 그래도 너무 서운해하덜 말어.

여 (맛있게 딸기를 먹는다) 할머닌 안 드세요?

노파 난 늙어서 식욕도 읍서. 뭐가 맛난지도 모르겄고 배만 차면 그만이여.

(딸기 팩 건네며) 가져가서 신랑이랑 맛나게 나눠 먹어.

여 자꾸 이렇게 주시기만 하면 제가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잖아요.

노파 아녀, 아녀. 내가 뭐 바라고 그런 것도 아닌디.

여, 딸기 팩 챙겨들고 느리게 돌아서면,

노파 샥시.

여, 멈춰 선다.

노파 내가 쪼매난 부탁 하나만 혀도 될까?

여 (다시 경계한다) 부탁이요?

노파 뭐 거시기한 건 아니고. 내가 만약 죽거들랑 내 시신 처리 좀 해돌라고. 그냥 보다가 요 며칠 안 보이면 구청 같은데다 연락 좀 햐줘. 그 짝에서 알아서 잘 해줄 텐게.

여 할머니. 그런 말씀 마셔요. 오래오래 사셔야죠.

노파 암만 그래도 아가들도 있는디 시체 냄시 풍기며 마무릴 할 순 없지 않겄어? 죽는 날을 내가 택할 수 있으면 좋겄지만 살아보니 그것도 내 맘대로 안 되고. 시상에서 제일 나쁜 게 지 목숨 지가 끊는 거라 그럴 수도 없고. 얼마 안 되지만 이 콧구녕만한 집구석도 여기저기 뒤져보면 쓸 만한 게 있을 거여. 마지막 부탁 들어준 보답이다 생각하고 부담 갖지 말고 가져. 보니께 나도 이제 얼마 안 남은 거 같더라고. 세상천지 아는 사람이라곤 자네가 준 요 쥐새끼랑 자네 집안 식구들이 전부니께.

여 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러면 저희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노파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내가 오히려 미안허지. 나, 한 번만 만져 봐도 되나?

노파, 여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여자의 배에 손을 지그시 댄다.

노파 꼼틀거리는구만. 생명이. 한 생명이 가믄 또 다른 생명이 오겄지. 그것이 자연의 섭리니께. (여자의 배에 대고) 환영하네. 이 세상에 온 걸.

여, 노파가 준 딸기 팩을 가지고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온다.

여, 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선다.

남 어떻게 됐어?

여, 딸기 팩을 남자에게 집어 던진다. 너부러진 딸기들

남 뭐야, 이게?

여 입양 보내.

남 뭐?

여 그렇게 해.

남 뭔 소리야?

여 막달이라 지우진 못하겠구, 그냥 입양이나 보내자구!

남 지긋지긋하다, 정말. 또 그 소리냐?

여 네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이잖아!

남 난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여 (노려보며) 미친 새끼. 할머니가…. 할머니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반복 재생된다)

남과 여, 동시에 옆집을 돌아본다.

(암전)

>>등장인물

남자

여자

노파
2018-01-01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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