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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잃어버린 기억, 이젠 내가 기억할게”

“엄마의 잃어버린 기억, 이젠 내가 기억할게”

안동환 기자
안동환 기자
입력 2017-12-12 17:40
업데이트 2017-12-12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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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 펴낸 영화감독 하윤재

“가시나, 내가 니를 어찌 잊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덤에 가서도 나는 니 생각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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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재 영화감독
하윤재 영화감독
치매에 걸린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장담했다. 몇 년 전 어느 볕 좋은 봄날이었다. 엄마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딸의 말은 가슴속에서만 맴돌았다. “내 인생의 가장 오랜 친구, 엄마. 이젠 내가 엄마를 기억할 거야.”

치매 환자의 기억은 시간, 장소, 인물 순으로 소멸된다. 신간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판미동)는 지금은 딸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치매 엄마와 함께한 지난 10년간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경남 하동에서 헛기침만 해도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한다는 400년 고택의 종부였던 여든둘 엄마와 막내딸 하윤재(45)씨. 2007년 12월 엄마의 나물 무침 맛에 이상을 느낀 하씨는 병원에 갔다가 엄마의 치매를 선고받는다. 책은 그 후 두 사람이 함께한 아프고 슬프고 행복한 일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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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이었던 어린 하윤재 감독과 눈을 마주치며 자주 웃던 엄마는 치매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까지 잊어버렸다.  하윤재 제공
막내딸이었던 어린 하윤재 감독과 눈을 마주치며 자주 웃던 엄마는 치매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까지 잊어버렸다.
하윤재 제공
하씨는 첫 장편영화 데뷔를 앞둔 감독이다. 그녀가 2009년 연출한 단편영화 ‘봄날의 약속’은 단편영화제의 칸이라는 프랑스 클레르몽페랑 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르는 등 10여개국에 초청됐다. 15분짜리 영화가 감독의 엄마를 모티브로 했다는 걸 안 외국 영화인들은 하씨와 엄마의 삶에 관심을 드러냈다. 영화 속 주인공 엄마는 자식들에게 헌신하다 봄이 오면 꽃구경을 가자던 친구마저 떠나보내고, 치매 환자인 엄마를 돌본다. 끝내 오지 않는 봄날을 기다리다 화분 속의 꽃처럼 시들어 가는 영화 속 엄마는 하씨 엄마와 꼭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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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굽은 등엔 지나온 세월이 있다. 그 애처로운 등을, 그 옛날 엄마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하 감독은 자주 쓰다듬는다. 하윤재 제공
엄마의 굽은 등엔 지나온 세월이 있다. 그 애처로운 등을, 그 옛날 엄마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하 감독은 자주 쓰다듬는다.
하윤재 제공
하씨에게 치매는 ‘상상할 수 있는 공포’였다. 어린 손녀 앞에서 벽에 똥칠하는 모습을 보였던 친할머니에 대한 잔상, 치매로 15년 동안 고통을 겪다 숨진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 등이 36배속으로 하씨를 강타했다. 하씨는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엄마에게 약 한번 잊었다고 다그치고 괴롭혔다”면서 “혼자만 분주해져 멀쩡한 엄마의 영정사진을 찍고, 가기 싫다는 사람들을 설득해 가족여행을 떠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스스로 괴로워했다”고 말한다.

‘치매=가정파괴범’이라는 하씨 말대로 가족들은 변질해 가는 일상에 짓눌린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무게감에 짓눌려 있지는 않다. 여성 영화감독의 세밀한 시선은 일상의 잔잔함과 유쾌함으로 향하고, 때때로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성숙함으로 이어진다. 엄마의 치매 연차가 늘수록 걱정이 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살림 주도권을 쥐게 된 하씨가 여기저기 쌓인 살림도구 중 욕실에 있던 빨간 고무다라이를 버릴 때 10년 체증이 내려가는 듯 후련했다고 쓴 대목에선 웃음이 나온다.

딸의 기억 속에 엄마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종부로 식솔들을 책임져야 했고, 그 와중에 오남매를 낳고 키웠다. 늘 단단해 보인 엄마에게 하씨는 기저귀 사용법을 알려 주고, 집 나간 엄마를 찾아 헤매며 마음을 졸인다. 새벽 3시 엄마가 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들은 하씨는 벌떡 일어나 쫓는다. 무엇엔가 홀린 듯 짧고 불규칙적인 보폭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엄마. 하씨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엄마 옆에 붙어 “엄마 어디 가?”라고 다정히 말을 건넸다. 엄마는 외계인과 교신하다 들킨 듯 움찔한다. “답답해서 운동 나왔다, 와?” 금세 눈물이 고인 하씨가 “밤하늘에 별이 와 이리도 많노. 어찌 저리 반짝거릴까?”라고 말을 돌리고, 엄마는 한참 동안 밤하늘을 보다 중얼거렸다. “반짝거리긴 뭐가 반짝거리노. 시커먼 하늘 때문에 버들버들 떨고 있구만.”

자다가 변을 지린 채 어쩔 줄 몰라 당혹해하는 엄마의 기저귀를 갈아 주며 그 옛날 엄마가 자신에게 한 것처럼 등을 쓸어내려 주던 딸은 한밤중에 정신이 든 엄마가 속삭이던 말을 잊지 않는다. “자식이 여러 명이어도 그중 유독 인연이 깊은 자식이 따로 있는기라. 그냥 업보라고 생각해라.”

책은 엄마와 보낸 10년을 통해 치매는 ‘결과’가 아닌 하나의 ‘과정’이란 걸 웅변한다. ‘기억을 잃어 가는 엄마’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엄마’에 대해 얘기한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는 글귀가 품고 있는 사랑과 책임을, 그리고 서로를 잇고 있는 엄마와 딸의 특별한 기억들 말이다.

“문득문득 깨닫게 돼요. 세상 끝난 줄로만 생각했던 일상 틈틈이 유쾌하고 따스한 시간들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요. 세심하게 보살핀 시간만큼 엄마의 치매 속도가 더뎌져 다행이에요. 유난 떨며 찍었던 영정사진은 옷장 안에서 뽀얗게 먼지만 쓰고 있어요(웃음).”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2017-12-13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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