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해방촌에서] 가을 하늘 공활하고

입력 : ㅣ 수정 : 2017-10-09 18:06

폰트 확대 폰트 축소 프린트하기
올해는 윤달이 끼어서 음력 8월 15일, 즉 추석도 그만큼 물러난 양력 날짜에 맞았다. 추석 하루 전이 개천절로 화요일, 연휴가 시작된 그 전 주말이 마침 9월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끝나니 훌쩍 10월도 중순에 접어든다. 직장인들은 열흘간의 휴일이 주어져서 참으로 쉼직스러웠겠다만, 직장에 다니지 않는 나는 뭐 특별히 좋을 일도 없고 얼레벌레 달이 바뀐 채 날이 가버린 게 왠지 억울하고 허전할 따름이다. 이제 한 해가 또 저물어 가는가라는 건 다소 이른 소회겠지. 하지만 마감이 발등에 떨어진 짧은 글들을 건드리지도 못한 채 연휴를 지내고 나니, 올해 마치기로 결심했던 몇 권의 책 원고며, 이런저런 약속이며 지키고 싶은 도리며, 어떻게 해도 시간과 능력이 모자란다는 초조함에 지레 기가 더 꺾인다. 정현종 선생님 시구대로 ‘기죽은 영혼’이로세. 그런데 정현종 선생님도 ‘기죽은 영혼’인 적이 있었을까.
지난 금요일 늦은 밤에는 이제하 선생님께 친구들과 뒤늦은 추석 인사를 갔다가 포커를 했다. 다음날인 토요일 낮에 동생 가족과 함께 역시 뒤늦은 성묘를 가기로 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마음껏 놀지 못했지. 아, 포커는 너무 재밌어! 그 시간만큼은 만사, 언제부터인가 힘들기만 힘든 만사를 잊는다. 내가 좀 비관적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돈을 딸 것 같은데, 포커 시간에 나는 유난히 낙관적 인간이 된다. 형편없는 패를 들고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카드를 덮지 못하는 것이다. 어쩐지 꼭 올 것만 같은 것! 그것이 기어이 오는 확률이 나한테는 꽤 높은 편이다. 그때의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같은 무늬의 일련 번호 다섯 개가 아귀 맞춰질 때의 황홀함이여! 살벌한 진짜 도박판에서는 한 번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스트레이트플러시도 몇 번이나 했는지. 하지만 결과는 대개 신통치 않은 편이다. 두둑이 앞에 쌓여 있던 돈이 어느덧 눈 녹듯 사라지고 만다.
황인숙 시인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 황인숙 시인

나도 최후에 웃는 자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미신을 버리고 이성적이 돼야 한다. 매번 행운을 믿고 끝까지 카드를 받으니, 행운에만 기대지 않는 사람보다 원하는 카드를 받을 확률이 높을 수밖에. 숱한 실패를 거듭하는 와중에 말이다. 스트레이트플러시는 끔찍하게 아름답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려고 포커를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부테스’ 앞장에서 저자 소개를 읽다가 순간적으로 끔찍하게 가슴이 아팠지.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이란 구절이 불러일으킨 질투와 회한으로였다. 나도(혹은 내가) 그런 문장을 써야 했는데, 나는 너무도 멀리 있구나. 곧이어 나는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끔찍하게 아름다워서 뭐할 건데. 그러고 나니 통증이 눅여졌다. 못난 자의 방어기제인 냉소여라. 그런 냉소가 세상을 시시하게 만든다.

가진 돈을 몽땅 털리는 황폐한 맛도 있다지만 나는 그 맛을 모르니 진정한 도박꾼이 못 된다. 그저 즐겁게 놀다가 아주 조금 잃거나 조금 많이 따는 게 소망인 소박한 포커 애호가다. 명절이라고 모였으니 포커를 하기 십상이라서 나는 만전을 기하려 했다. 우선 눈에 띈 모든 카드를 외우자. 네 개의 무늬에 열세 개의 숫자, 어렵지 않잖아. 그런데 피곤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건강한 신체에 멀쩡한 정신이 깃드는 법. 피곤을 줄이고 몸을 만들자고 다짐했지만 피곤한 상태로 선생님댁에 가게 됐다. 결과는, 뭐 즐겁게 놀았다. 그 선배는 아무래도 못 당하겠단 말이야. 그 옛날의 명저 ‘포커, 알면 이길 수 있다’를 나는 1권만 봤는데, 선배는 2권도 봤다고 한다. 2권을 구해 읽어 봐야겠다. 내년 설날의 설욕전에 대비해야지. 이 한심한 인간아, 시를 좀 그렇게 열심히 써라!

놀기 좋은 날씨는 일하기에도 좋아서 직장인들은 대개 무더운 여름에나 휴가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모처럼 놀기 좋은 날씨의 휴가를 보냈겠다. 문득 나보다 12살 어린 친구 생각이 난다. 썩 매력 있는 비혼 여성인데 아직 운명의 짝을 만나지 못했다. 또 한 해가 저무는 걸 초조해 말렴. 너는 시절의 절세가인 하이로도 로로도 유리한 나이란다. 가령, 이십대 아가씨가 저보다 열 살 어린 상대를 만날 수 있겠니.
2017-10-10 26면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밴드 블로그

/

서울Eye - 포토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