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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경 기자의 출근하는 영장류] 마르탱 게르의 귀향

[홍희경 기자의 출근하는 영장류] 마르탱 게르의 귀향

홍희경 기자
홍희경 기자
입력 2017-09-26 17:52
업데이트 2017-09-2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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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경 사회부 기자
홍희경 사회부 기자
신문에는 대체로 정제된 역사가 기록되지만, 살다 보면 정제 전 불순물도 함께 보인다. 당대의 업적이나 갈등에 대한 정제된 기록은 문서고에 스크랩되지만, 불순물은 정돈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정제된 큰 역사의 틈새에서 나만이 눈치챈 불순물을 더해 저마다의 작은 역사를 지니는 것은 어른의 숙명이다.

기독교 세계인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태초의 세계는 혼돈이었고, 마치 우유에서 치즈처럼 나온 덩어리에서 나타난 구더기는 교회에서 말하는 천사”란 특유의 세계관을 피력하다 화형당한 메노키오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다들 자신의 사투리로 각색한 작은 역사를 살고 있다.

참여정부 초반 초년 기자로 출입한 법원은 큰 역사의 마무리를 관찰할 요충지였다. 원래 서초동에서 처리되던 각종 비위 사건뿐 아니라 학계에서 자정되지 못한 논문 조작, 정치권에서 매듭짓지 못한 행정수도 이전, 호주제 폐지까지 전부 사법부가 다뤘다. 문서고 속 신문은 이때를 ‘정치의 사법화 시대’로 기록했다.

만사가 사법화되면서 세상의 갈등이 양측 당사자의 입장으로 구조화돼 대립하기 십상이란 느낌은 불순물로 남았다. 불순물은 공식 기록만으로 재구성되지 않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을 때 유용한 도구였다. 예컨대 양쪽 모두 센 당사자인 검찰과 경제 사범이 맞붙어 대립하면, 사건은 인수분해되고 형량은 ‘0’을 향해 수렴됐다. 반면 세상에 자기 편이라곤 남지 않은 패륜범은 처벌 과정에서 정상참작이 더해지고 인권의식이 곱해져 피해자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할 만큼의 선처를 받아 내기 일쑤였다. 재벌과 흉악범이란 양 극단에 유독 관대한 처벌 양태는 ‘대등한 양쪽 당사자라는 인위적 구조를 먼저 설계하고, 양쪽 얘기를 견줘 판단하는 게 사법인가 보다’란 개똥철학을 보태 이해하는 식이다.

풋내를 벗고 행정부를 출입했다. 교육제도는 공정한지, 사각 없는 복지인지 등 공익을 주로 논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도 전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공익은 때로 공무원의 사정과 결합해 구현된다’는 식의 짐작을 동원해야 했다. ‘나쁜 사람’이란 윗선의 한마디에 동료가 축출되는 환경에서 공무원은 ‘임기 중 무사고’를 따지고, 무사고를 위해 선거로 군림한 윗선 결정을 따르거나 책임이 따르는 결정을 미루는 사정을 이해해야 정책의 탄생이 납득됐다.

제법 머리가 굵은 뒤 접한 정치권은 원래 적시 입법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공간인 줄 알고 갔는데, 그런 장면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편을 갈라 상대를 폭격하는 게 정치’라는 경멸 섞인 지레짐작을 가감 없이 기사로 써도 될 정도였다.

십여년 만에 사법부 출입으로 귀향했다. 지난주 퇴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26일 취임한 김명수 대법원장도 “대립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세태를 탄식했다. 대립시킨 뒤 봉합하는 갈등 해소 방법을 최초로 알게 됐던 이곳에서 집단 논리에 싸여 상대편 얘기는 듣지 않고 비난전만 벌이는 지금을 바꿀 새 불순물의 단초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치즈와 구더기 #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
2017-09-2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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