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정 컬처 살롱] 지도를 따라가면 길이 보일 것이다

입력 : ㅣ 수정 : 2017-06-2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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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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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최근 방송되고 있는 한 드라마에는 흥미로운 뇌 이야기가 나온다. 뇌의 한 부분이 과도하게 발달하여 작은 소리에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 아이는 뇌의 일부분을 제거한 후 고통에서 해방됐다. 물론 후유증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됐지만, 뇌도 일반 장기처럼 제거를 통한 치료가 가능한가라는 생각에 뇌과학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푸른 눈의 시간여행자, 그는 왜 매일 아내와 이별하나’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든이 넘은 영국인 할아버지. 그분의 아내는 한국인이다. 항공 기관사였던 그가 한국에 들렀을 때 아내를 만났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세계를 여행하며 행복하게 살아온 부부는 남편이 은퇴한 뒤 한국에 정착했는데, 몇 달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치매를 앓고 있는 남편은 매일 아침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며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 찾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파트 경비실도 가고, 동네 지구대도 가고, 심지어 아내가 다녔던 병원에도 가보지만 아내는 없었다. 아내가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아내와 이별했던 그 순간처럼 서럽게 울었다. 밤이 지나 아침이 오면 처음 있는 일인 듯 보이지 않는 아내를 찾아 그는 또 집을 나섰다. 도대체 그의 기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내를 찾고 기다리고 이별하기를 반복하는 영국 할아버지의 순애보는 애절했다.

얼마 전 이런 일도 있었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얼굴도 낯익고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 듯했다.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이 무엇인지, 나랑 무슨 일로 알고 지낸 사이였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은 아는 척 환한 웃음과 조금은 큰 목소리로 별일 없냐고 인사를 건넸다. 상대방도 잘 지내고 있다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잠시의 침묵. 그쪽도 나를 명료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답답하다.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헤어지고 한참 뒤에야 그 사람이 누군지 생각났다. 일 때문에 만나 함께 회의도 몇 번 했고, 심지어 밥도 먹었던 사이인데 이렇게 깜깜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 사람 이름은 명함첩을 뒤져 간신히 찾아냈다.

기억은 이렇게 소멸되거나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때론 다르게 저장되기도 한다. 현직에서 은퇴하신 선배님들과의 모임에 가보면 지난 시절 무용담이 꽃을 피운다. 대부분 결과가 좋은 일에는 자신이 주도적 역할을 했고, 그렇지 못한 일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듣게 된다. 하지만 다른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새로운 사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일인데도 기억의 편차는 컸다. 무의식속 보호 본능이 만들어 낸 자기중심적 기억의 왜곡이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 보면 원본이 무엇이었는지 찾을 수 없는 것처럼 기억도 그렇게 사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때로는 왜곡이, 거짓이 진실이 되고, 때론 자신까지 속는 경우도 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길을 잃는 것과 같고, 기억을 왜곡하는 것은 길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다. 잃어버린 길은 찾으면 되지만, 망가진 길은 복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급한 마음에, 이기적인 마음에 걸어온 길을 망가뜨리지 말자. 그 길에 이어 만든 새 길의 끝이 낭떠러지일 수 있다. 지도를 펼쳐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면 가야 할 길이 분명히 보일 것이다. 기억도 그러하다.

2017-06-2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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