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런웨이 조선] “편두통, 참아야 하느니라” 조선 멋쟁이의 폼생폼사

① 망건

입력 : 2017-03-20 22:38 ㅣ 수정 : 2017-03-2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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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뽑히고 피가 날 정도로 단단히 둘러매… 보톡스 효과 뺨치는 망건

조선 후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기산풍속화첩’에 나오는 상투 트는 모습. 머리숱이 많으면 상투를 틀어야 하는 곳 밑에 있는 머리숱을 쳐낸 뒤(왼쪽) 둘레의 머리를 걷어 올려 묶은 다음 상투의 크기를 가늠해서 그 길이만큼 감는다(가운데). 이어 묶은 머리를 돌려 감은 뒤 남은 머리카락 끝으로 상투 밑 부분을 감아 남성용 비녀인 동곳으로 마무리한다(오른쪽).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 조선 후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기산풍속화첩’에 나오는 상투 트는 모습. 머리숱이 많으면 상투를 틀어야 하는 곳 밑에 있는 머리숱을 쳐낸 뒤(왼쪽) 둘레의 머리를 걷어 올려 묶은 다음 상투의 크기를 가늠해서 그 길이만큼 감는다(가운데). 이어 묶은 머리를 돌려 감은 뒤 남은 머리카락 끝으로 상투 밑 부분을 감아 남성용 비녀인 동곳으로 마무리한다(오른쪽).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는 조선시대 복식에 관한 숨은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연재물 ‘런웨이 조선’을 새로 시작합니다. 조선 사회에도 시대를 앞서가는 멋과 유행은 존재했고, 남다른 미적 감각을 지닌 멋쟁이들도 많았습니다. 한국 복식사를 전공한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매주 화요일 독자 여러분을 조선시대 런웨이로 안내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유행 속에서, 유행을 좇으며 산다. ‘유행’이라는 것은 참 어렵다. 조금만 앞서면 난해한 패션이라며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십상이고 조금만 늦어도 촌스럽다느니, 멋을 모른다느니 하며 무시당한다. 하이힐이 처음 나왔을 때 발의 통증이나 허리의 무리를 감수하고 많은 멋쟁이들의 호응으로 보편적인 유행이 된 것이나 당시의 사회적 시선도 그렇지만 활동이 불편하고 보기에도 난감했던 미니스커트, 스키니진도 이제 당연한 패션이 됐다. 멋쟁이들은 시대를 앞서가며 멋을 위해 어색함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 불편이 더해져 고통이 되더라도 참아낸다. 오히려 멋쟁이들은 그 고통마저 쾌감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개항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조선을 ‘모자의 나라’라고 했다. 그것은 다양한 종류의 모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자를 쓰기 위해 당시 조선의 멋쟁이들이 얼마나 패션에 신경을 썼는가를 방증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관례를 치른 남성들의 머리스타일이 한결같이 상투머리였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은 것 같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 멋진 머리를 만들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 참으로 눈물겹다.

조선시대 남자들이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상투를 트는 것이다. 상투를 틀기 위해서는 먼저 머리를 빗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머리를 빗을 때 사용하는 빗은 얼레빗과 참빗 두 종류가 있다. 얼레빗으로 일단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가지런히 하고, 참빗으로 삐죽삐죽 빠져나온 머리를 정리한다. 그다음 본격적으로 상투를 틀어야 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이 상투의 크기이다. 조선의 멋쟁이들이 생각한 상투의 크기는 높이 5~8㎝, 직경 2.5㎝ 정도이다. 이런 정도의 크기를 만들면 ‘알’만 하게 되는데, 이 ‘알’만 한 상투는 당시 패션의 기본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크기의 상투를 만들기 위해서는 머리숱이 관건이 된다. 먼저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숱부터 없애야 한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상투가 맺어지는 곳 아랫부분에 머리카락을 밀고 주변머리를 걷어 올려 묶은 다음, 상투의 크기를 가늠해 그 길이만큼 돌려 감은 후 남은 머리카락 끝으로 상투 밑 부분을 감고 남성용 비녀인 동곳으로 마무리한다.
조선 양반들은 망건을 칠 때 아주 단단하게 쳤다. 의욕적이고, 젊어 보이는 효과를 위해서였다. 망건 아래 눌린 자국이 여실히 보이는 강이오(1788~미상)의 초상화(보물 제1485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조선 양반들은 망건을 칠 때 아주 단단하게 쳤다. 의욕적이고, 젊어 보이는 효과를 위해서였다. 망건 아래 눌린 자국이 여실히 보이는 강이오(1788~미상)의 초상화(보물 제1485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상투를 틀고 나서 헤어밴드처럼 두르는 망건은 그저 흘러내리는 머리가 없도록 깔끔하게 정리하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망건을 어떻게 매느냐에 따라 인상은 180도 달라진다. 흐리멍덩하게 보일 수 있는 인상은 망건 하나로 날렵한 조선시대 사대부로 변신한다. 기록을 보면, 망건을 풀고 난 자리에 피가 흥건할 정도로 상처가 생길 만큼 단단히 맸다고 하니 망건의 원래 목적인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동여매는 용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망건을 당겨 맸을까? 강이오 초상(보물 제1485호)을 보면 망건을 어찌나 단단히 맸는지 이마의 위아래가 눌리고 눈썹의 꼬리까지 올라간 것을 볼 수 있다. 이마는 팽팽해지고 심지어 볼록하게 튀어나오기까지 했다. 전체적인 인상은 어디 하나 어리석어 보이거나 희미해 보이는 구석 없이 긴장되고 의욕적으로 보이며 젊어 보이기까지 한다. 오늘날 보톡스 시술의 효과가 이렇지 않을까?
18세기에 그려진 ‘조씨 삼형제 초상화’(보물 제1479호)의 일부. 망건을 일직선으로 두른 것이 아니라 완만한 산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범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이를 호좌건(虎坐巾)이라고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 18세기에 그려진 ‘조씨 삼형제 초상화’(보물 제1479호)의 일부. 망건을 일직선으로 두른 것이 아니라 완만한 산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범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이를 호좌건(虎坐巾)이라고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18세기에 그려진 조씨 삼형제 초상(보물 1478호)에서 제일 막내로 보이는 인물의 옆모습을 보면 망건을 일직선으로 두른 것이 아니라 완만한 산 모양을 하고 있다. 이마 중심은 위로 올라가고 옆은 귀 위에서 눌렀다. 앞은 높고 뒤가 낮아서 마치 범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이를 호좌건(虎坐巾)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두른 망건은 벗을 때 당줄을 풀지 않고 위에서 잡아 올려 벗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망건을 쉽게 벗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다 뽑혀가며 망건을 잡아 올려 벗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세속에서는 머리털이 일찍 벗겨지는 것을 출세하는 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대머리가 되기 위해 이마를 밀기도 하고, 족집게로 뽑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망건을 잔뜩 죄어 매고 벗을 때 뽑듯이 망건을 벗겨내면 손쉽게 머리털이 뽑혀 이마가 훤해지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이렇듯 패션에 여러 가지 역할을 한 망건은 편두통을 불러오기 일쑤였다. 머리카락이 빠질 정도로, 또 피가 날 정도로 단단히 친 망건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이를 두액(頭厄)이니 수건(囚巾)이니 하여 옳지 않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건이 당시 멋쟁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멋을 부리는 것이 고통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정도 고통은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방법에 골몰했다. 멋쟁이의 품위를 잃지 않고 해결해 줄 수 있는 도구가 있었으니 바로 ‘살쩍밀이’다. 원래 ‘살쩍’은 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이다. 편두통이 오면 살쩍을 망건 속으로 집어넣는 척하며 망건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면서 고통을 완화시켰다. 편두통이 오더라도 살쩍밀이에게 맡기고, 멋쟁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쯤이야 고통도 아니지 않았을까?
이민주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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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주 선임연구원

●이민주 선임연구원은 성균관대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한국 복식사를 전공했다. 복식사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로 조선의 문화를 패션으로 풀어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치마저고리의 욕망’, ‘조선 사대부가의 살림살이’ 등을 썼고,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는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2014년)로 선정됐다.
2017-03-21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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