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시간여행] 전당포에 맡겨 놓은 눈물

입력 : ㅣ 수정 : 2017-03-1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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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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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작은 도시를 지나는 중이었다. 모퉁이 건물 2층에 붙은 ‘전당포’라는 간판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아직도 저런 곳이 남아 있구나…. 왠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전당포야말로 어렵던 시절의 상징이자 가난한 이들의 눈물이 배어 있는 곳 아니던가.

전당포(典當?)는 남의 물건을 맡아 두고 돈을 빌려주는 곳이다. 대신 기한 내 찾아가지 않으면 처분해서 이익을 얻는다. 전당포를 기쁜 일과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보통은 지긋지긋한 가난과 비정한 쇠창살, 그리고 인색한 이미지의 주인이 함께 떠오르기 마련이다.

전당포 단단한 쇠창살에는 애달픈 사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죽자사자 공부했지만 계속 낙방하고 더이상 버틸 수 없어 법전을 들고 찾아간 고시생, 아버지의 유일한 유물인 손목시계를 품고 문 앞을 뱅뱅 돌던 청년, 아내의 병원비 때문에 단벌 양복을 맡겨야 했던 어느 가장…. 아무리 애써도 하루를 살아 내는 것조차 숨 가빴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전당포였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절박했던 건 아니었다. 돈이 급한 사람들이 찾던 곳은 분명하지만, 그리 가난하지 않은 대학생들도 단골 고객이었다. 술값이나 용돈이 떨어지면 시계나 미니카세트, 전자계산기, 심지어 교과서까지 들고 전당포를 찾는 청년들도 꽤 많았다. 시골 출신 학생들은 물건을 맡겼다가 집에서 용돈을 보내 주면 다시 찾으러 가고는 했다. 물론 제때 찾지 못해서 새 주인의 품으로 넘어간 물건들도 많았다.

전당포의 전성기는 1970~80년대였다. 70년대는 양복·구두 같은 것들이, 80년대에는 컬러TV 같은 가전제품이 단골 품목이었다. 잘나가던 전당포를 밀어낸 건 신용카드였다. 1990년대 들어 신용카드 보급이 확산되면서 전당포를 찾는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비교적 쉽게 대출받을 수 있는 금융 상품들이 쏟아지면서 90년대 후반 이후에는 하나둘 문을 닫더니, 결국 카지노 촌에서나 연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쉽사리 만나기 어렵던 전당포가 곳곳에서 부활하고 있다고 한다. 당장 포털 검색창에 ‘전당포’라고 치면 수없이 많은 이름이 쏟아진다. 불황이 길어지면서 전당포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아르바이트 자리가 부족한 방학 중에는 정보기술(IT) 기기를 맡기고 소액 대출을 받는 ‘IT전당포’가 인기라고 한다. 대학생들은 스마트폰과 노트북컴퓨터, 태블릿PC 등을 맡기고 20만∼40만원씩 대출받는다.

이와는 다른 개념의 전당포도 많다. 청담동, 압구정동 등에는 이른바 ‘명품전당포’들이 성업 중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고가의 물건들이 오간다. 노트북컴퓨터나 디지털카메라는 그나마 고전에 속한다. 주요 품목은 루이비통이나 샤넬 같은 상표를 단 가방, 고가의 양복, 명품 시계들이다. 고급 골프 세트도 나온다고 한다.

물론 쇠창살 안으로 쭈뼛쭈뼛 시계나 반지를 디밀던 전당포는 아니다. 쇠창살은 아예 없다. 입학 기념으로 받은 시계와 용돈을 바꾸던 대학생은 물론 아이를 업은 채 눈물을 삼키며 결혼반지를 맡기던 새댁도 없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었다. 새삼 그 옛날 ‘눈물의 전당포‘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허덕이며 걷던 시절의 고통이 가슴에 새겨져 시간으로도 지우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전당포라는 이름이 바늘 끝처럼 아플 것이다.
2017-03-1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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